카르페 디엠(carpe diem) / 허열웅
우리는 시간의 나그네다. 깊고 고요한 섣달 그믐밤을 지나 수탉의 울음소리에 사멸(死滅)과 신생(新生)은 서로 몸을 바꿨다. 이때면 사람들은 모두가 시간 철학자가 된다. 세월이 쏜살같다며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다고도 한다. 새해를 맞을 때가 좋은 건 새로운 마음을 갖고 새로운 계획을 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둥근 원이기도 하기에 계절은 어김없이 돌고 돈다. 지금은 추운 겨울이니 따뜻한 봄도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런 예측 가능한 순환 덕분에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게 된다. 아침 해 떠오르는 풍경화가 그려진 달력 첫 장을 바라보면서 흘러가는 세월을 돌아본다.
지금도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되돌릴 수도, 늦출 수도, 멈추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저축하거나 남에게 빌릴 수도 없다. 어느 사업가의 말대로 사람이 곁에 있으면 머리를 빌릴 수 있고, 신용이 있으면 돈도 빌릴 수 있으나 시간과 건강은 빌릴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장기 이식은 가능하지만 시간의 이식은 신(神)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시간은 우리에게 무한정 베풀어지는 것도 아니고 고작 100여 년의 삶을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옛일을 잊지 못해 마음을 썩이고, 앞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허비한다. 젊었을 때에는 시간이 달팽이 걸음처럼 느리게 흐르다가 장년기,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자진모리에서 휘모리로 바뀌는 느낌이다.
직선이든 원이든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이 정지된 곳을 다녀보았다. 서울의 경복궁이나 중국의 자금성, 영국 버킹검궁전,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 같은 오래된 고궁이나 이집트의 거대한 무덤 속이었다. 수천 년 전 시간이 고스란히 그 당시 모습으로 고여 있었다. 21세기 메트로폴리탄 한 복판에서 담벼락 하나 지나면 먼 ‘옛날’이 들여다보였다. 또 한 시간이 비켜간 골목이나 재래시장도 가보았다. 옛 흔적이 이끼에 묻어 있는 북촌과 서촌 길 그리고 종로 예지동 시계 골목, 피맛골의 지지미집, 강원도 진부 시골 장날 같은 곳이다.
시간은 세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의 유명한 그림이 있다. 16세기 베네치아 미술의 황금기를 이끈 화가 ‘티아치노’는 <신중함의 알레고리>를 제작했다. 그림 상단의 글귀는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신중하게 처신한다. ‘미래의 행동이 추하지 않기 위해’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글은 과거→현재→미래의 순으로 시제가 나열되고 ‘과거를 통해서 밑에’는 노년을 그렸으며, ‘현재를 신중하게 처리한다’의 아래는 장년을, ‘미래의 행동이 추하지 않기 위해서’ 밑에는 청년을 그렸다. 세 얼굴을 보면 장년의 얼굴은 선명하고, 청년은 빛이 너무 많아서 좀 흐릿하고, 노년은 그늘이 짙어 흐릿하다. 과거는 지나가서 희미하고, 미래는 오지 않아 불투명하고, 현재만이 확실한 것처럼 해석되어 시간이 지닌 삶의 무게가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본다. 첫 번째는 바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은 “서두름이란 그 자체로 사탄”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분주함을 능력 있는 사람의 기준처럼여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분주함은 서두름을 동반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가져올 확률이 많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삶의 의미와 방향도, 가치와 아름다움도 생각할 여유가 부족하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니까.
두 번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습관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방법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노르웨이 숲>에서 “신사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삶의 의미와 목표를 발견하는 일이 먹고 마시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잠시 여유를 갖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리해보자. 그러면 의외로 넉넉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오늘의 삶에 감사하며 현재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거나 미래에 대한 지나친 염려에 사로잡혀 오늘의 삶을 감사하면서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을 놓친 채 과거에 살고, 지금을 버려두고 미래만 꿈꾸면 삶은 공허해지고 마음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때로는 현대인은 시간을 아끼려고 조바심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을 낭비하는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한다.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받고, TV를 보면서 음식을 만드는 등 ‘멀티데스크’를 일상화 하지만 대부분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보다 효율성이 떨어지는 시간의 경우가 많다.
한 해는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나누어지는 시간의 영토다. 동일한 넓이와 높이와 길이로 주어지는 그 시간성으로부터 차별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시간만이 금수저나 흙수저를 구분하지 않는 대칭 거울이다. 시간이란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우주적 공간, 다시 말해 우리의 창조적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인생의 경작지이다.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주문한 “오늘의 상황을 즐기고 의미 있게 살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떠 올린다. 때로는 하루가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한 해는 너무 짧게 지나간다.
아름다운 삶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통해서 성공이 아닌 성장의 스토리이며 외적 확장보다는 내적 성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한 해가 끝나는 연말 우리는 매번 새로운 다짐으로 새해를 맞이한다. 우리에게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반성하지 않는 삶이 살 가치가 없다면, 제대로 살지 않은 삶은 뒤돌아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새해가 시작되는 날의 초심을 잃지 않고 결연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또 한 번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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