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닭 선생 / 민명자

닭 선생 / 민명자

 

 

 

내 친구 C는 교외에 아담한 전원주택을 짓고 산다. 반듯한 양옥에 마당이 꽤 넓다. 친구들 몇이 모처럼 그 집에서 모였다. 잔디 깔린 마당에 놓인 디딤돌이 작은 길을 만들고 담장 주변엔 화초가 한창이었다. 마당 한 구석엔 닭장도 보였다. 꽃닭과 오골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자연스럽게 닭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친구는 닭들 하는 짓이 사람 사는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신기할 정도라고 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날 친구가 들려준 닭 얘기 한 토막을 적어본다.

처음엔 수탉 두 마리, 암탉 세 마리, 합해서 다섯 마리를 식구로 들였다. 모두 꽃닭 종류다. 알을 얻는 재미도 있지만 하얀 털에 종아리까지 소복하게 털이 난 외모가 아름다워 관상용으로도 제격이다. 그런데 수탉 두 마리 중 힘센 녀석이 하는 짓이 가관이었다. 한 집에 두 가장이 있을쏜가, 일부다처의 표본인 듯, 위계질서라도 잡으려는 듯, 암탉들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데리고 자면서 다른 수탉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편의상 힘센 녀석을 센돌이, 힘없는 녀석을 약돌이라 부르자. 애초부터 기선을 제압당한 약돌이는 그 기세에 눌려 맥도 못 추고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그렇긴 해도 그들은 그냥저냥 큰 일 없이 평화롭게 겨울을 잘 나는 듯했다. 의기소침한 약돌이 덕분에 외적 평화가 유지된 면도 없지 않았던 셈이다. 문제가 생긴 건 다른 식구가 들어오면서부터다.

봄 들어 오골계 암탉 다섯 마리를 새 식구로 들였다. 그런데 꽃닭과 오골계 사이의 텃세와 기 싸움이 가관이었다. 종족끼리의 길들이기라고나 할까. 하여튼 바둑돌도 아닌데 흰 닭과 검은 닭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더욱 놀라운 건,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약돌이의 태도가 기세등등하게 돌변했다는 거다. 수탉이라곤 오직 센돌이와 저뿐이었는데 암탉이 새로 들어오니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아니면 센돌이에게 당한 한풀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작심한 듯 오골계들을 쪼아대면서 모이도 먹지 못하게 을러댔다. 을이 을한테 해대는 갑질이었다.

그러기를 일주일 여, 조금 사그라지나 싶었는데 급기야 반전이 일어났다. 약돌이 녀석이 덩치가 제일 작은 오골계 암탉을 만만하게 보고 올라타려 했다. 그런데 웬걸, 약돌이의 무력함을 이미 눈치라도 챘는지 앙칼진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돼먹지 못한 수컷의 힘자랑을 그냥 보아 넘길 암탉이 아니었다. 그 결과는? 약돌이가 벼슬을 찢기고 목을 찍혀 피를 흘리는 완패로 끝났다. 제 몸을 지키려는 암탉이 필사적인 투혼을 발휘하여 승리한 것이다.

암탉한테마저 진 약돌이는 시름시름 기운을 잃어갔다. 패배자로 낙인이 찍혔으니 동료 닭들도 업신여기고 왕따를 시키는 게 역력했다. 가만히 있는 약돌이를 툭하면 쪼아댔다. 닭이나 사람이나 왕따를 당하면 삶의 의욕을 잃기 마련인가. 약돌이는 식욕을 잃은 채 점점 뒤로 밀리면서 한쪽 구석에 웅크려 있곤 했다.

주인장 입장에선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녀석이 하도 딱해 지렁이를 잡아다 먹이거나 생선도 주고 약도 발라주었다. 겉 상처는 아물어 가는데 내심 마음의 상처가 컸는지 그냥 두면 죽을 것만 같았다. 무리와 떼어놓아야겠다 싶어 약돌이를 닭장 밖으로 따로 내놓았다. 구박을 받아도 제집이 좋은지 처음엔 닭장 안을 기웃거리더니 차츰 마당을 오가거나 나무 그늘 아래서 놀기도 했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외출을 했다가 돌아와 보니 약돌이가 보이지 않았다. 독수리가 채갔나, 오소리가 물어갔나. 방심한 게 탈이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가끔 집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던 오솔이 짓 같다. 내부의 적을 막아주려다 외부의 적에게 희생을 당하게 한 거다. 한 생명 살리려다 오히려 죽게 만들었으니 주인장 마음이 편치 않다. 싸우든 말든 그냥 저희들 무리에 섞여 살게 두었으면 죽음은 면했으려나.

약돌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센돌이는 가부장으로서의 위엄을 한껏 지키고 산다. 모이를 주면 제가 먼저 냉큼 먹는 법이 없다. ~옥 꼬꼬꼬꼬, 암탉들을 불러 모으고는, 암탉들이 먹는 걸 보고서야 저도 모이를 입에 댄다. 가장이 식솔들 입에 밥 들어가는 거 보고서야 안심하고 자기 배 불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철학은 책상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찮은 존재들의 삶에서 나온다. 힘없으면 닭도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이니 뾰족한 수가 없어 더 딱하다. 그런데 약돌이를 따돌린 센돌이, 왕따를 시킨 행동거지엔 회초리를 들어야 마땅하지만 투철한 책임감으로 톡톡히 해내는 가장노릇은 웬만한 사람보다 나으니 가상하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 하려나. 벌도 상도 함께 받아야 할 센돌이. 계격(鷄格)과 인격(人格)은 다르다고, 센돌이나 약돌이는 닭 세상에나 있을 뿐 만물의 영장인 사람 사는 세상은 다르다고, 딱 잘라 도리질을 할 수도 없는 형편이니 어쩌나. 난해한 세상살이 닭을 선생삼아, 반면교사삼아, 인간사 둘러봐야 할 거나.

하긴, 어떤 높으신 공무원은 민중은 개, 돼지요,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했다니 동물 농장은 조지오웰의 소설에만 있는 게 아닌가보다. 우리 사는 세상이 영락없는 동물 농장이 되어버렸으니 민중의 소리도 꼬~옥 꼬꼬, 멍멍, 꿀꿀꿀로 들리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