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 저쪽 / 김채은
어릴 적 자라나던 고향 마을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만 동네가 있는 가촌街村형 농촌이었다. 읍내에서 이십 리 쯤 서쪽으로 달려온 신작로는 마을의 중간에 이르러 남쪽에서 뻗어온 새 길 하나와 만나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 곳을 삼거리라고 불렀다.
바로 그 삼거리의 분기점에 우리 집은 자리 잡고 있었다. 바깥채의 마당은 그대로 신작로에 이어져 있어서 서너 살 무렵부터 대문 밖으로 나갈 때마다 '차 오나 보며 조심해서 놀아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자라났다.
식구들이 걱정을 하는데도 나는 걸핏하면 집 앞의 삼거리에 나가 세 방향으로 갈려 나간 신작로를 바라보며 서 있기를 좋아했다. 구부러진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무엇이 있고 누가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궁금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읍내로 가는 동쪽 길을 가장 자주 바라보았다. 그 길은 닷새마다 아버지가 장엘 가는 길이었고 주말이면 작은 언니가 돌아오는 길이기도 했다. 큰 언니와 작은 오빠가 있는 서울도 그리로 간다 했고 장가 든 큰 오빠는 새언니를 데리고 그 길로 떠나갔다.
나도 자라면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만 남겨놓고 저 길로 떠나가야 할 거라는 막연한 예감은 종잡기 어려운 슬픔이고 두려움이었다.
세 길은 모두 나지막한 산자락을 돌아서 사라져갔다. 홀로 서서 바라보는 그 모퉁이들은 아득한 서러움인 듯도 하고 설레임도 같아서 어린 판단으로는 분간이 안 되는 미지의 '저편'이었다.
나이를 먹고 자라서 드디어 고향을 떠나올 때 어머니는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오래도록 바라보며 길가에 서 있었다. 허망하고 시름겹던 그 얼굴은 훗날 내가 도회의 낯선 골목을 돌며 지는 해를 바라볼 때 저녁 이내가 되어 흘러내리고는 했다.
그렇게 떠나온 후 기억할 수도 없는 숱한 길을 걷고 모퉁이를 돌아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는 사이에 세상살이라는 게 결국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뻗어간 모퉁이 돌기의 노정路程임을 짐작도 해보고 환경과 상황이 사람을 혼돈시켜 때로는 헷갈리고 무력하게도 만들지만 천성은 보다 집요한 본능으로 자신을 지탱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모퉁이 저편에 대한 호기심으로 팽팽히 긴장한 채 걸어가는 버릇은 그대로 살아가는 한 방법이 되어 버렸다. 이 고비만 넘기고 나면 저쪽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생生의 정답 찾기에 홀려서 무수한 삶의 모퉁이들을 힘든 줄도 모르고 돌아서 왔다. 철없던 시절 공간적이고 가시적인 개념으로 시작된 모퉁이 기호嗜好는 어느덧 상징적이고 운명적인 것으로 변이되었던 것이다.
'차가 오나 보며 조심해서 놀아라.'고 이르시던 어른들의 말씀은 집을 떠나온 후로는 다시 듣지 못했다. 그러나 내 의식은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의 삼거리라고 수시로 일깨워 주었고 그 때마다 쏜살같이 달려오는 운명의 자동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가야 할 모퉁이를 바로 찾으려 애쓰면서 살아왔다. 그런데도 걷고 있는 이 길은 여전히 모호할 뿐이고 얼마나 더 많은 모퉁이가 기다리고 있는지 또한 모른다. 그 끝 어디쯤에는 분별이 필요 없는 막다른 골목 하나가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러 팽팽했던 긴장감은 덧없어지고 만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의 길 끝머리에 오직 혼자서 가야 할 모퉁이 하나씩을 감춰 놓고 살아간다. 분명히 있지만 어디쯤 있는지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마지막 모퉁이 저쪽.
생명은 비롯됨의 근원이 불분명해서 더욱 신비한 것이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작별해야 하므로 머무는 동안의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작별인사 한 마디 없이 먼 길로 떠나버린 인연들을 추적하다가 가없는 적막만을 얻어 가지고 돌아온 이 밤, 떠난 이들의 안식을 비는 내 염원이야 어떠하든 바람은 지금도 불고 싶은 곳으로 불어가고 무상無常의 흔적으로 남을 외진 모퉁이 하나는 찬비로 내리며 새벽잠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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