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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행복한 정육점」 / 이상렬

행복한 정육점 / 이상렬  

 

 

 

여기 한 점 그림이 있습니다. 제목은 행복한 정육점. 길 맞은편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창을 통해 행복한 정육점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이슥한 밤, 한 사람만 보이고 세계는 정지 되었습니다. 한 장의 풍속화 같습니다. 나지막한 건물, 흰 간판에 형광조명이 성긴 시선을 모아줍니다.

통유리로 된 화면 속 가게는 제법 커 보입니다. 계산대 앞에 앉은, 실세實勢로 보이는 1인 외에 무려 남자만 셋입니다. 화면 정중앙은 선임 같아 보이는 직원이 차지했습니다. 기골은 장대하고 표정은 노숙합니다. 길가를 응시하는 예사롭지 않은 눈매로 보아 베테랑의 태가 완연합니다. 다른 한 명은 뒤편 냉동고 앞에 고기를 나르는 중입니다. 큰 덩치에 동작은 숙련돼 보입니다. 마치 그림의 주연이나 되는 것처럼 호기가 찹니다만 주인공은 아닙니다.

화면 속 또 한 명, 왼쪽 구석에 옹색하게 배치되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입니다. 얼굴이 희고 섬약해 보입니다. 뿔테 안경을 쓴, 이십대 초반의 앳된 학생 같습니다. 흰 가운을 입고 손님 앞에 고기를 썰고 있습니다. 쩔쩔매고 있습니다. 손님의 뒷모습이 후덕해 보여 다행입니다. 저 청년에겐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아들입니다.

아들은 그림밖에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연필을 쥐어주면 만화를 그렸고, 붓을 주면 수채화를 그렸습니다. 예술고를 졸업하고 미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 아비의 꿈을 보상해 줄 아이, 내겐 꿈의 대리자였습니다. 그림을 그리며 그렇게 사는 것이 아비나 아들에게는 기정사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녀석은 나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감상적이며 감수성이 풍부합니다. 현실에서는 굼뜨지만 이상理想에서는 민첩합니다. 예술이니, 그림이니 하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빠르게 뜁니다. 그림은 왜 그려야 하고, 왜 예술의 세계를 찾아야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했습니다. 그러던 아들이 언제부턴가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리 좋아하던 그림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삭연한 눈길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어느 날, 한 마디 말을 툭 던지고 나갑니다.

난 가난하게 살기 싫어요.”

그 후, 붓 대신 칼을 들었습니다.

녀석의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궁핍한 현실 앞에 자신의 꿈을 소각해버린 아들, 그 결정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아비가 지켜야 하는 이상(理想)은 오늘 만큼은 비겁해 보입니다.

아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응급실이었습니다. 고기를 발골(拔骨)하다 왼손 힘줄이 끊어졌답니다. 아연한 걸음으로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들은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한 손엔 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습니다. 붓을 들어야 할 저 손에. 하얗게 타버린 꿈의 재를 한 움큼 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산산조각 난 꿈 앞에서 다 잃은 듯 주저앉아있는 아들의 눈을 보는 만큼 슬픈 순간은 또 없을 겁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정육점 간판 조명이 꺼졌습니다. 그 위에 달이 떠 있습니다. 조명이 꺼지니 달이 보입니다. 인간사와 자연사가 겹쳐지는 지점이랄까요. 현실이 막을 내리면 어느 한곳에 있던 이상(理想)이 꿈틀대는 걸까요. 앞에서 나는 아들이 일하는 정육점의 정경을 한 장의 풍속화 같다고 말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헷갈립니다. 무엇이 이상이며, 무엇이 현실인지. ‘이상현실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택한 쪽이 현실일까요?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것은 가장 현실적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아들은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에서 그림이 나왔을까. 아니면 그림에서 삶이 나왔을까요. 알고 보면 정육점이라는 현실에서 그림이라는 이상이 나온 것이지요. , 진짜 그림은 현실이지요.

여기 눈앞에 펼쳐진 아들의 삶, 행복한 정육점은 아들이 내게 그려준 삶의 그림입니다. 아비는 지금 여윈 시선으로 감상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그린 그림엔 군소리가 없습니다. 주제는 먹고 살기, 소재는 칼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칼을 들었다는 거지요. 이상의 고상함이니, 현실의 처절함이니 굳이 따로 떼어 생각하기 싫다는 겁니다. 그림을 보니 다 읽혀집니다. 인생, 예술, 주제, 소재. 이런 것들 말입니다. 하물며 진짜 삶에서는 뭔들 못 읽겠습니까. 그뿐입니까. 공간이나 거리감을 살리지 않아도, 기교나 꾸밈이 없어도,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도, 볼썽사나운 난해함이 없어도 완벽한 그림입니다. 그래서 더 투박하고 애련합니다. 그림과 삶, 삶과 그림이 겹쳐지는 지점이 무릇 저러할 것 같습니다. , 그림 한 번 속 깊습니다.

이제 아들은 더는 지면의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오늘도 이렇게 삶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땀 냄새나는 삶의 숨결이 사라지면 이미 예술이 아님을 알아버린 아들! 제대로 예술하고 있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