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의 새벽 / 조옥상
복숭아가 달콤하게 익는 여름이다.
줄지어 서 있는 양버즘나무 사이를 신나게 달린다. 청아한 매미소리와 시원한 소슬바람에 귀와 볼이 호사를 누린다. 목적지는 문경 희양산 아래 큰 선방이 있는 봉암사鳳巖寺다. 이 사찰은 스님들께서 수행이나 하안거를 지내기 위해 찾아오기로 유명하다.
저만치 보이는 희양산 다섯 바위의 신비스런 기운이 마음을 차분하게 눌러준다. 선방스님들의 정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자동차 속도를 줄인다. 이 하안거에는 산새들도 나직이 노래하며 댓잎 스치는 바람까지도 조심스럽기는 매양 한가지일 테다.
친구의 기사 노릇 하기를 잘했다 싶다. 웅장한 산새 풍경에 빠져 친구의 애탔던 일을 깜빡 잊고 아! 감탄하다 얼른 입을 다물었다. 산을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한 친구는 가끔 가슴 졸이는 불안에 떤다. 숲이 우거진 여름산은 산행에 익숙한 사람들도 주의를 기울인다. 그런데 그날 친구 남편은 집 근교도 아닌 자동차로 1시간 이상 달려가야 하는 산을 향해 좀 늦은 시간인데도 부득부득 배낭을 메고 나갔다. 자정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친구는 새벽 1시가 되자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어 파출소에 신고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산을 좋아해서 미안해' 남편이 남긴 말에 친구의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봉암사 서쪽으로는 옥석대玉石臺가 있다. 암석에 조각된 불상 아래 너른 바위에서 목탁소리가 난다는 명승지! 헌데 그날 밤은 목탁 소리도 멎고 사방이 고요했다. 선방에 앉아 수행하시던 스님들도 비몽사몽 헤매는 시간이 아니다. 명상으로 연마된 오관이 다 열려 있는 새벽이다. "사람 살려" 힘없이 꺼져가는 가느다란 목소리, 여름밤 베이스로 깔아주는 풀벌레도 쉼표를 찍는 사이 살짝 들렸다 끊기고 그러기를 여러 번, 귀를 기울이던 스님 한분이 침묵을 깼다,
"분명 산에서 들려오는 사람소리요. 방장스님께 알립시다." 방장스님의 해량海諒은 즉각 희양산 등산로를 잘 아는 처사님을 앞세우고 손전등을 켜든 스님들을 이쪽저쪽으로 올라가라는 지시였다.
빛은 어둠을 뚫는다. 불빛은 우거진 숲 사이 바위 바위를 비췄다. 어느 바위인가.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물체가 보였고 가까이 가보니 분명 사람이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로 축 처져 있었다.
"여깁니다. 여기" 모여든 스님들이 힘을 합해 끌어내렸고 임시로 마련된 들것에 묶어 조심조심 사찰로 내려왔다. 따뜻한 물을 떠먹이고 온몸을 주무르는 동안 친구 남편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몇 시간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친구 남편은 선방 스님들에 의해 목숨을 구했다. 분명 여러 번 오르던 산인데 정상에 오른 시간이 이미 늦었고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밧줄을 걸고 빨리 내려오려다가 그만, 스님들께 큰 은덕을 입었다고 친구 남편은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인명은 재천在天이라 했던가, 숨이 꺼져가는 가느다란 목소리 그 소리가 스님들 귀에 들렸다니 분명 하늘이 도운 것이다. 몸을 추스른 친구 내외가 하늘같은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고 무수히 여쭈어도, 스님은 하늘이 도운 일이니 개의치 말라며 말을 아끼셨다. 친구는 그해부터 여름이 되면 빛깔 좋고 맛좋은 복숭아를 차에 싣고 선방이 있는 봉암사를 향해 달려간다.
장수의 상징인 복숭아가 딱 그맘때면 익어서 다행이라는 친구, 자기 남편이 제일 좋아하기도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친구가 갸륵해 보인다. 아무렴 친구 남편이 건재하고 그 옆에서 행복해하는 친구를 보면 해마다 내게 운전을 부탁한다 해도 매번 유쾌히 응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겠다. 일주문 앞에 복숭아 상자를 내려놓고 조심조심 돌아섰다. 하늘엔 평화로운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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