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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자전거를 타고 오는 봄 / 설성제

자전거를 타고 오는 봄 / 설성제

 

 

 

바래어 일어설 줄 모르는 바싹한 풀잎 사이로 새 기운이 오른다. 포슬포슬한 볕이 아직 땅에 닿기도 전에 여린 봄풀이 다투어 고개를 내민다. 기어이 땅을 뚫고 나오고야 마는 근성, 봄을 향한 투지, 꽃이나 나무에 대한 귀여운 시샘이 생명으로 돋움 하는 것일까.

내 생애 그토록 사무치게 바랐던 것이 있었을까. 이보다 더 강렬하게 꿈틀거렸던 무언가와 한때가 있었던가 싶다. 그것은 친구가 운동장을 배배 돌며 타는 자전거, 핸들 앞에 바구니가 달린 키 작은 자전거를 보며 일어났던 일이다. 나이와 무관한 삶의 계절을 한 바퀴나 제대로 돌지도 못했을 그때, 나는 생애 첫봄을 맞이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가슴 앞에 두 손을 마주 잡고 검지를 내세우며 딱 한 번만 타보자고 애원을 했다. “알았어, 한 바퀴만 더 돌고.” 친구의 대답은 개불알꽃처럼 앙증스러웠다. 그러나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더 피어오를 꽃이 남았다는 듯 또 내 앞에서 멀어져 운동장 끝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며칠이나 하다 보니 이상한 것이 발동했다. 도깨비 뿔 같은 것이 삐죽삐죽 내 몸을 뚫고 솟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온몸에 뿔을 달고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의 자전거는 친구 것과 달랐다. 4학년 꼬맹이가 타기에는 안장이 어마하게 높았다. 감히 올라앉을 생각일랑은 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 앞에 버젓이 자전거랑 함께 서고 싶었다. 친구는 아직도 자전거 바퀴를 굴리며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친구 것보다 배나 높은 아버지의 자전거를 멋있게 타 보일 수만 있다면…….

간절히 원하면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일까. 아버지처럼 한쪽 발로 페달을 살짝 굴리다 가속이 붙으려는 찰나 살포시 반대쪽 다리를 치켜들며 올라타면 되는 법. 백 번도 더해봤지만, 갑자기 다리가 길어지지 않는 한, 자전거의 키가 작아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저절로 눈에 띈 것은 벤치였다. 자전거를 벤치와 나란히 세워놓고 자전거 둘레를 엉거주춤 돌아 벤치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안장에 정착했다. 한쪽 발은 벤치에 걸쳐놓은 상태로, 반대편 발로는 페달 축을 건드려 페달이 돌아 신발 바닥에 닿으면 놓치지 않고 대기했다. 자전거를 굴릴 준비가 완벽했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전거와 나 뿐이었다. 이제 광활한 운동장을 믿으며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양손에 잡힌 핸들이 떨렸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 몸을 곧추세우며 페달을 힘껏 굴리는 순간, 그대로 자빠지고 말았다. 또다시 벤치 옆에 자전거를 바싹 세우고 벤치 위에 올라섰다. 똑같은 동작을 다시 하기를 셀 수가 없었다. 운동장에서 불어오는 명지바람이 나를 쓰다듬었다.

자전거는 수백 번도 넘게 패대기를 당했다. 아직 제대로 탄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삐뚤어진 핸들 바르게 돌려놓기, 늘어진 체인 제대로 걸어놓기까지도 할 수 있었다. 무한 반복은 무엇이든 식은 죽 먹기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점점 알아갔다. 짧은 다리가 오히려 페달 굴리기의 재미를 더해주었다.

자전거가 걸레처럼 너절해지자 두 손을 놓고도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보다 잘 타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아버지도 나만큼은 못될 것이고, 내 친구는 잽도 안 될 것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몰고 교문 밖으로 나갔다.

"누가 내 뒤에 탈 사람?”

모두가 손을 내저었지만 내 앞에서 자전거를 타며 알짱거렸던 친구가 타주겠다고 나섰다. 친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억에 남을 멋진 자전거여행을 시켜주겠다며 큰 소리로 나를 꼭 붙잡으라고 외쳤다. 내 허리를 잡은 친구의 손에 온몸이 오글거리며 간지러웠다. “, 나 잡지 마!”라고 외치는 순간, 비틀비틀. 우리는 탱자나무 울타리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대침 같은 가시들에게 벌집 쑤신 것처럼 찔리고서야 겨우 일어섰다. 이 또한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동생도 태우고 엄마도 태우며 마음껏 봄을 누볐다.

반백 가까운 자연의 봄을 지나오면서 자전거를 타고 온 나의 첫봄이 발판 되어 두 번째 세 번째 봄도 맞이해보았다. 새움이 돋고 꽃을 피우고 나비가 날아드는 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었다. 홀로 높디높은 자전거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발바닥이 닿지 않는 페달을 걷어차 올리며 달려가고픈 마음이 하늘까지 부풀어 올랐을 때 비로소 봄이 왔다. 땅속에서 수백 번의 넘어짐과 일어남의 연습 끝에 생의 봄이 새파랗게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