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벼리 / 최영자
햇빛이 아파트 공터 붉은 단풍나무와 푸른 소나무와 길옆 노란 은행나무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빛의 명도가 흐려지거나 사라질 때마다 나무들도 제 그림자를 자주 바꾸었다. 텅 빈 한낮의 놀이터. 정자 마루를 점령한 햇빛이 아직은 꼭대기까지 미치지 않았지만 그것은 곧 모든 것을 점령할 터이다. 아이들을 데려가기 위한 유아원의 노란 차량이 아파트 담장 너머 노란 은행나무 옆에 주차해 바스켓에 실뭉치를 담듯 아이들을 하나 둘씩 옮겨 데려간 지도 이미 시간이 꽤 흘렀다. 이후 놀이터는 적막하다. 노란 차량이 아이들을 다시 데리고 오기 전까지 한동안 적막은 계속될 것이다. 한숨이라도 내쉬면 쨍하고 금이라도 갈 것 같은 적막의 시간. 수인 번호 같은 옥죔.
검은 사각모자에 하늘색 마스크를 한 여자가 개 두 마리를 이끌고 가을 햇빛의 한 자락 문을 열고 슬며시 나타났다. 길에 늘어선 나무들의 긴 그림자가 약간 흔들리는 듯했다. 여자가 나타나는 시간은 거의 일정하다. 여자가 진공처럼 느껴지는 저 햇빛의 문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앞장선 개, 그 뒤를 따르는 여자, 여자를 비추는 햇살이 한 세트가 되어 정돈된 느낌이다. 그들이 나타나자 놀이터 가장자리 소나무 아래 정자에 내려앉은 햇빛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처럼 매우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여자의 개는 이전보다 살집이 늘어나고 제법 튼실해져 있다.
하오로 접어들어 햇빛이 정자 마루를 완전히 점령하자 그늘의 농도는 조금 옅어졌다. 나는 방 책상 앞에 앉아 창문 너머로 하오의 빛을 받아 더욱 붉은 진홍빛으로 물드는 단풍나무와 그리고 건너편 정자의 소나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한낮, 오래된 나무들은 페시미즘적 징후를 자아낸다. 햇빛이 몰려 있는 나무 밑동 부근에 등을 활처럼 구부린 고양이가 얌전히 웅크리고 앉아있다. 나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햇살을 잔뜩 머금은 고양이의 잔등이 공처럼 부풀어 있다. 나는 문득 고양이의 잔등을 거칠게 움켜잡아보고 싶은 적의를 느낀다. 저 고양이의 잔등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에 비해 너무 무거운 생의 무게. 그것은 어쩌면 저 한낮의 태양이 부과한 생의 무게인지도 모른다.
잠시 나는 생각에 잠긴다. 사람을 변모시키는 가장 위험한 적은 바로 한낮의 적요임을. 그것은 알제리의 태양처럼 때로 인간의 뇌를 파멸시킨다. 따지고 보면 모든 원인은 끊임없는 균열을 조장하는 빛의 파장과 그것을 조장하는 빛의 배우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이 연극의 마지막 주인공처럼 느린 걸음으로 등장했다. 꽤 오래전부터 나는 노인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이제 노인은 지팡이 없이 잘 걷지 못했다. 그래도 노인은 매일 같은 시간에 정자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늘 정자 앞 경계석에 앉아 햇빛바라기라도 하듯 태양을 향해 온몸을 내맡겼다. 노인의 생체리듬은 빛의 속도보다 얼마만큼 빨라져 있는 것일까. 노인의 몸이 한껏 부풀려진 저 하오의 고양이 잔등처럼 가벼워진다면 빛의 속도를 넘어서 어느 날 수천억 광년의 시간 속을 뚫고 흔적 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을까. 그러기에 노인의 몸은 아직 너무 무거운 것인지도 몰랐다. 노인은 끝까지 피사체가 되어 있는 자신을 알아채지 못했다. 찬란하도록 노란 은행나무 주변의 햇살을 더욱더 짙은 황금색으로 들끓게 했고 노인은 부유하는 빛의 스펙트럼에 녹아 사라지는 듯 흐물흐물하다. 그래서인지 노인의 빛바랜 고동색 잠바와 녹색 하의가 허물처럼 생경하다. 한순간 고요한 적막이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며 일렁인다. 정자의 그림자가 이제 거의 뒤로 물러났고, 무료한 하루의 시간을 지탱하고 있던 소나무의 긴 자락도 마당 한 귀퉁이로 완전히 물러갔다. 누군가에게는 죽음 충동을 부추기기도 하는 하오의 적막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어느 순간 나는 어둠의 장막 속에서 솟아오르는 한 줄기 여명黎明을 본다. 그것은 분명 하오의 태양이 마지막으로 발하는 빛의 미립자, 벼리이다. 그것은 '시간의 춤' 같은 비장미를 자아낸다.
긴 하루의 끝에서 귓가를 맴도는 하프의 선율. 시간의 깃발처럼 펄럭이는 발레리나의 슈즈가 허공을 향해 솟구치는 환영을 본다. 폰키엘리의 《라조콘다》의 제3막 2장의 주제인 <시간의 춤>을 가로지르는 피치카토가 어둠 속 장막을 타고 음울하게 울려 퍼진다. 이어 어릿광대를 조롱하듯 크레센도로 울려 퍼지는 '밤 시간의 춤'의 현란한 선율이 저녁 어둠을 뚫고 비장미를 장식하듯 울려 퍼진다.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라라~.'
긴 하루가 이렇듯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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