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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보호자 / 이혜경

보호자 / 이혜경

 

 

 

십칠 년 만에 처음이었다. 내가 결혼을 해서 살림을 꾸린 후로 부모님은 딸네 집에서 자고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일이 있어 다니러 오실 때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라 붙들어도 내 집이 편하다며 한 밤중에도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나곤 했다. 그랬던 두 분이 이번에 대대적인 집수리를 하면서 집을 비워 주느라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서 며칠 묵게 되었다.

첫날부터 정신이 없었다. 이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뒤늦게 한 술 뜨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크고 작은 보따리를 겹겹이 앞세우고 부모님이 현관에 도착한 것이다. 이사라도 가나 싶을 정도로 옷가지, 베개, 심지어 전기 매트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큰 짐은 그렇다 쳐도 산딸기 박스며, 유정란, 즐겨먹는 커피믹스까지 일일이 챙겨온 엄마의 준비성에 혀를 내둘렀다.

어머니는 방에 보따리를 내려놓기 무섭게 싱크대 앞에 섰다. 매의 눈으로 싱크대 서랍 한 칸 한 칸을 스캔하고, 냉장고 점검을 마친 후 행주를 들고 부엌 구석구석을 닦기 시작했다. 집수리가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자식 집에 오겠냐며 그냥 쉬라고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엉덩이 붙이고 앉을 틈이 없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연신 하품을 했다. 방마다 문을 열어보며 여기가 누구 방인지 질문을 반복하다가 금방 재미가 없는지 의자를 베란다에 갖다 놓고 하염없이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를 물끄러미 보던 아버지가 어머니가 있는 주방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아무래도 나는 양산에 다녀와야겠다. 부산은 벌써 공기부터가 답답하다.”

양산에서 부산으로 오신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저렇게 갑갑증을 내니 열흘을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 앞섰다. 요즘 들어 부쩍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아버지가 염려되어 지하철역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해도 택시를 타는 곳만 가르쳐 달라며 고집을 부렸다.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핸드폰과 함께 종이에 우리 집 주소와 내 전화번호를 적어서 손에 쥐어 드렸더니 이것만 있으면 됐다며 집을 나섰다. 바로 오 분 전의 기억도 가물가물하는 아버지가 종이 한 장만 가지고 무사히 집을 찾아올지 걱정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는 유난히 밖으로 다니기를 좋아했다. 역마살이 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미였다. 자식들에게 더없이 다정한 분이었어도 휴일에는 아버지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자가용을 산 뒤부터는 날개를 단 듯이 차를 나고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세월이 지나 시력도, 체력도 도저히 따라주지 않아 운전대를 놓은 후에도 아버지의 외출은 이어졌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는 동안 사람도 구경하고 풍경도 구경하면서 다시 반대편 종점으로 돌아오는 버스 투어가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게라도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갑갑해서 못 견딘다고 했다. 날마다 버스를 타고 하루는 언양으로, 또 하루는 원동으로, 다른 날은 구포로 다니면서 냉면 한 그릇 사 먹고 해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양산에 가신 아버지는 다행히 오후 해가 산을 넘어갈 무렵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길을 모를 때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적어 준 종이를 보여주니 만사형통이더란다. 우리 집에서 지내는 동안 마침 먹고 양산으로 나가서 오후에 부산으로 오면 되겠다고 하는 아버지의 얼굴에 활기가 느껴졌다.

다음 날부터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며 말려도 아버지는 아침마다 나갈 채비를 했다. 평소보다 나가는 시간이 조금이라고 늦어질라 치면 조바심을 내면서 얼른 집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택시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또 버스를 타야 하는 복잡한 길을 매일 같이 고집했다. 신기한 것은 방금 알려드린 외손녀 이름도 기억 못 하면서 해가 질 무렵이면 기가 막히게 집을 잘 찾아왔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면서 아버지가 차를 타러 나가도 처음만큼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소풍가는 날을 기다리듯이 아버지는 양산의 집으로 돌아갈 날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기다렸다. 드디어 부산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 아버지는 어느 때보다 설레 보였다. 마침 나도 나갈 일이 있어서 차로 지하철역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뒷자리에 앉아 빌딩숲을 올려다보던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가 어데고? 생전 처음 보는 동네다.”

아버지 맨날 택시타시고 오시던, 우리 집 가는 길이잖아요.”

아버지는 내가 주소를 적어준 종이를 한 번 더 확인하더니 이것만 있으면 된다며 기어이 지하철역에 내렸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아버지가 핸드폰을 어머니 가방에 놓고 간 것을 알았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가 있다 한들 연락을 할 수 없으니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해거름이 되도록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겉으로는 아무 일 없을 거야하면서도 어둠이 깔리면서부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밤이 깊도록 아무런 기별이 없어서 만약에 대비해 경찰에 신고를 했다.

신고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이 부서, 저 부서를 옮겨 다니며 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말하고 인상착의가 담긴 사진도 보내야 했다. 사진을 보내라는데 수천 장이 담긴 내 핸드폰 폴더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없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딸이라는 사람이 주민번호 뒷자리도 헛갈려 하고, 사진도 없다 하니 경찰관이 퉁명스레 한 마디 던졌다.

아니 보호자라면서 그런 것도 모르고 신고를 해요? 정신도 성치 않은 어른을 밖에 보내면서 핸드폰도 안 챙기면 어떻게 찾으려는 겁니까.”

입이 열 개라고 할 말이 없었다. 머리에는 보호자라는 한 단어만 계속 맴돌았다. 수십 년 동안 나의 든든한 울타리였고 보호자이던 아버지가 객지에 와서 겨우 며칠 머무는 동안 이 사단이 났으니 경찰관의 핀잔에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보호자로서 아버지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핸드폰에 아버지의 사진 한 장 없는 무심한 딸이 보호자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기나 한 걸까. 오늘따라 보호자라는 말이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이대로 아버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자꾸만 목 안이 뜨거워졌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겨우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냈다. 뜻밖에도 아버지는 수리가 끝나지도 않은 친정집에 혼자 가 있었다. 혹시 아버지가 집에 다녀갔나 싶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테리어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오후에 집을 둘러보고는 그곳에서 자고 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공사도 마무리 지어야 하고 쌓인 먼지 때문에 안 된다고 극구 말렸는데도 걱정 말고 가라며 사람들을 내보냈다는 것이다. 핸드폰도 없고 집수리 때문에 집전화도 연결되지 않아 아버지는 마냥 혼자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없다보니 가족들이 걱정하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내일이면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겠더니 했단다.

부랴부랴 양산으로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가족들의 속이 새까맣게 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사위한테 밤늦게 운전을 시켜서 미안하다, 부산으로 가고 싶어도 길이 엄두가 안 나더라.”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엄마가 눈을 흘기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미안할 줄 아니 알면 다행이네요. 이럴 때는 멀쩡하다니까.”

나도 할 말 있다. 이십 년 넘게 키운 딸 줬으니 운전 좀 시키면 뭐 어때.”

이십 년 넘게 그 누구보다 든든하게 딸을 지켜 주었던 나의 보호자가 아닌가. 그런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밤새 운전을 해도 피곤하지 않을 일이다. 겨우 열흘짜리 보호자 노릇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딸이 미안하지 않도록 끝까지 농담을 하는 나의 오랜 보호자가 옆에 있어서 어느 때보다 고마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