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꽃 / 박헌규
깊어 가는 가을,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요즘은 벼를 심고, 베고 탈곡까지 모든 작업을 기계로 하지만 사십여 년 전만 해도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가을마당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람 손이 많이 필요했다.
어느 해 벼 베기가 한창일 무렵, 우리 가족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서릿들(지형상 서리가 일찍 내림에서 유래) 논배미에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 두 명과 같이 벼를 베고 있었다. 시골 농사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가을걷이는 들판에 저녁 땅거미가 내려와야 하루 일이 끝이 난다. 그날도 시간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논바닥에는 저녁 찬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우리 형제들은 ‘오늘은 이만 하고 집으로 가자. 내일 와서 마저하자.’라는 아버지의 영(令)을 이제나저제나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씀인가. 우리들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아이고 허리야, 내 담배 한 대 피울 때까지 좀 쉬어라. 조금 늦더라도 남은 것 마저 베고 가자.”
어느 누구도 ‘오늘 그만 하고 내일 합시다.’라는 말은 없었다. 바쁜 낫질을 하면서도, 줄곧 그만그만하니 주고받던 대화마저 아버지의 ‘늦더라도 남은 것 마저 베고 가자.’ 그 말씀 한마디에 갑자기 뚝 끊어졌다.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논둑을 향해 무거운 걸음으로 나왔다. 논둑에 나와 앉아서도 대화는 없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초가을 밤 어둠보다 더 빨리 논바닥에 내려앉고 있었다.
아버지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시더니 입에 물고는 성냥불을 그어 담배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나 가을 저녁 찬 바람에 성냥불이 담배에 닿기도 전에 연방 꺼져 버리곤 했다. 두 번 세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순간 저만치에서 지켜보던 어머니가 아버지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덜컹,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평소에 담배로 인해 아버지가 병원 약 신세를 질 정도로 고생하셨기에 담배를 피우실 때마다 어머니는 많은 역정을 내곤했다. 오늘은 들판에서 어머니의 음성이 또 높아지겠구나 싶어 염려를 했다. 그런데 나의 염려와는 달리 아버지가 네 번째 성냥불을 그을 때 어머니의 두 손은 재바르게 성냥개비를 잡은 아버지의 손을 에워쌌다. 불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막이를 만들었다. 그 모습은 막 피어오른 연꽃, 꽃봉오리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게 희미해진다고 했건만, 지금도 그 모습은 선하게 남아 내 눈앞에 여울진다. 깊어 가는 가을 들판, 초저녁 어스름에 어머니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붉은 불빛은 어름다움을 넘어 어머니의 성스러운 몸짓이 피워낸 행복의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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