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지키며 / 양희용
인생은 짧습니다. 행복과 불행, 쾌락과 고통 모두 한순간입니다. 인간들은 백세시대라고 떠들지만 허세일 뿐입니다. 기나긴 우주의 시간에서는 그냥 한 점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 점도 찍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천도재까지 바라지 않지만 나의 껍데기만이라도 고향 땅에 뿌려 주면 좋겠습니다. 혹시 환생한다면 담벼락에 올라 ‘꼬끼오~’라고 목청껏 소리치며 새벽을 깨우고 싶습니다.
3~4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은 인도, 말레시아 같은 동남아에서 살았습니다. 넓은 초원을 힘차게 달리고 부채처럼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리며 나무 위를 날아다녔습니다.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무런 구속도 두려움도 없는 자유는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마침 먹거리를 찾고 있던 인간들에게 쉽게 포획되었고, 그때부터 잘 달리지도 날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명색이 조류인데 시골의 철망 달린 함석집에 살면서 인간들에게 먹이를 구걸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렇다고 선조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좋든 싫든 바꿀 수 없는 나의 뿌리입니다.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습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았습니다. 초지일관 노란 병아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와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공부한 것 중 ‘줄탁동시’라는 사자성어만 기억납니다. 원래 우리 가문이 머리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단백질과 비타민, 필수 아미노산으로 가득 채워진 나의 동그란 몸뚱이는 영양덩어리 그 자체입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다렸으나 어머니는 끝내 나의 머리를 두드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사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뭐 있겠습니까. 그저 게으르고 잠만 자고 있던 나 자신을 원망할 뿐입니다.
요즘 ‘웰빙’에 이어 ‘웰다잉’이 추세라고 합니다. 즐겁게 사는 것 못지않게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겠지요. ‘아름다운 죽음’, 나에게는 사치스러운 말입니다 나는 생(生)으로, 아니면 뜨거운 물속이나 프라이팬 위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특별한 고통 없이 생으로 눈을 감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데, 주로 목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먹습니다. 장어꼬리가 남자의 정력에 좋다는 말처럼 아무 근거 없는 이야기 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성분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죽음은 물속에 넣고 끓이는 것입니다. 프라인팬 위에서의 고통이야 잠시지만 더운물 속에서는 10분 이상 뒹굴며 온몸을 바둥거려야 합니다. ‘팽형(烹刑)’이라는 형벌이 고대 중국과 조선 시대에 잠시 있다가 사라졌는데, 아무런 죄도 없는 내가 이런 끔찍한 벌을 받는다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케케묵은 관습과 전통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는 50g 정도의 몸무게에 잘 깨지는 피부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연약한 나를 갖고 바위를 친다고 말합니다. 너무 허무맹랑한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 나의 몸을 던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랗고 하얀 나의 분신들을 터뜨려 흔적을 남기기 위함입니다. 그 흔적은 각자의 욕망과 울분, 삶에 대한 저항입니다. 거대한 장벽 앞에 선 시위 현장에서 내가 초개처럼 몸을 던지는 이유입니다. 신체가 허약하더라도 정신이 살아있으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누구의 삶이든 슬픈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 보람과 긍지를 느낄 때도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국수와 떡국, 만둣국, 비빔밥 등의 요리를 만들 때, 나는 고명이나 지단이란 이름으로 그 음식의 최고 상석에 올라갑니다. 무시무시한 물과 불의 전투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모든 재료를 통제하고 지휘하는 기분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가끔 그런 착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나도 한때는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소풍이나 기차여행을 가는 즐거운 시간에는 사람들이 나를 꼭 챙겼습니다. 점심 도시락 속에 나의 유무에 따라 학생의 품위가 달라졌고, 남학생들은 나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주먹질도 불사했습니다. 다방에서 커피나 쌍화차를 마실 때, 나의 노른자를 띄우고 참기름까지 몇 방울 떨어뜨려 즐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은 건 할머니의 따뜻한 손으로 시퍼렇게 멍든 손자의 눈가에 나를 문질러 주건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르는 나는 그 할머니의 사랑스러운 손길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습니다.
한때 나는 병아리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많이 불평했습니다. 지금은 내 운명에 충실하면서 나름 즐겁게 살다 가려고 노력합니다. 병아리로 태어났더라도 삼계탕이나 치킨집이서 생을 마감해야 하고, ‘조류인플루엔자(AI)와 살충제’ 같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살처분을 당한 우리 종족들이 수천만에 이릅니다.
어떻게 태어났던, 어떻게 살던 편안한 삶은 없습니다. 나만 힘들게 산다고 생각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각자 가야 할 길이 따로 있고, 그 길 위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영양가와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몇몇 셰프들은 나를 가격 대비 최고의 식자재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비싸도 300원 안팎입니다. 앞으로 나를 이용한 다양하고 맛있는 요리가 누군가에 의해서 계속 개발될 것입니다. 나의 무한한 변신을 기대해 주십시오.
오늘도 나는 캄캄한 냉장고를 지키며 당신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무슨 요리를 만들지 모르겠지만 알맞은 때깔과 색다른 맛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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