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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우도 등대 / 김백윤

우도 등대 / 김백윤

 

 

 

생각이 많아질 때면 바다를 찾는다.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간간이 불어주는 바닷바람 앞에 서면 막혔던 숨이 훅 터진다. 바람이 일어설 때마다 파도는 바다의 계곡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고, 그 깊이가 더해질 땐 바닥에 닿을 것만 같아 횡격막 아래가 저릿해진다. 바다는 바람이 거칠게 몰아쳐도 물보라만 내어줄 뿐 끄떡하지 않는다. 사투를 벌이는 바다 위로 소가 길게 누운 형상을 한 작은 섬 우도가 항공모함처럼 떠 있다. 소의 머리 쪽에는 외로운 등대가 서있다.

우도의 등대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무인이었다가 유인 등대로 바꾸었다. 오랫동안 바다를 지키던 등대는 낡고 쇠해져서 지금의 등대로 교체되었다. 우도 인근과 동중국해 바다를 밝히던 처음 등대의 오래된 등탑은 등대문화재로 영구히 보존 중이다.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노장의 대우를 받고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우도에 자주 다녔다. 아버지는 우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므로 그곳에는 친척집이 몇 있었다. 친척 집에 일이 있을 때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나선다. 그런 날에는 친척 아이들과 우도봉에 올라 등대 주변을 탐험하며 뛰어놀곤 했다.

등대지기 아저씨는 잘 아는 분이었기에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등대 뒤편에는 가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 그러다 어느 날은 아저씨의 주의를 거스르고 금지된 곳까지 갔다가 들키고 말았다. 그곳은 낭떠러지라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사람이 떨어져 죽기도 했었다며 혼내던 아저씨의 놀란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겁도 없고 철도 없던 어린 시절의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슬아슬했던 기억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밤이 되면 고요한 마을은 까만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어둠에 휩싸인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라 유독 밝게 비추던 우도봉의 등대 불빛은 신비한 기운을 뿜어내며 소년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어린 시절 우도에서의 일을 떠올리다 보니 어둠은 사위를 감싸며 물결 위로 내려앉는다.

바닷가에 서면 시선은 물을 건너 자연스럽게 우도봉 등대에 닿는다. 우도 등대는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깜박인다. 무슨 사연을 전하려는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바라보지만,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보낸 신호에 애써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단지 그가 서있는 자리를 확인시킬 뿐이다.

등대는 오로지 자신의 역할에 몰두한다. 미동도 하지 않으며 아우성치는 날씨 따위에 흔들리지도 않는다. 밤새도록 깜박이며 보내는 신호는 지나가는 배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외침이다. 안개가 장막처럼 덮친 날은 우우웅 우우웅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등대는 자신의 기분엔 아랑곳없고 바다 사람들을 향한 마음으로 한결같다. 먼 바다를 여행하고 돌아온 여행자들과 온종일 바다와 씨름하며 고된 노동에 지친 뱃사람들에게 등대는 마음의 닻을 내리고 쉬어도 좋다는 듯 살갑게 품는다.

가끔 가슴에 각인된 등대의 불빛은 갈 곳 잃은 내 마음에 길잡이가 되어 주기도 한다. 힘든 일이 있을 때나 잠 못 드는 깊은 밤엔 변함없이 눈길 보내는 등대의 불빛을 떠올린다. 어느새 마음을 따뜻이 지펴주는 평화로운 광경이 감은 내 눈 안에 별이 되어 박힌다. 등대의 불빛이 수면 위를 채색하며 꿈결 같은 풍경을 이룬다. 세상에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한 존재인 양 빛을 통해 밤바다를 안아준다. 나는 밤바다 위를 떠다니는 작은 배가 된 듯 포근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고요히 넘실댄다.

내 유년의 등대는 젊은 등대에 역할을 물려주고 의연한 모습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이제 우도를 찾는 이들에게 고즈넉한 풍경을 안겨주며 노장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