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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운흥사 석조石槽 / 김순경

운흥사 석조石槽 / 김순경

 

 

 

작심하고 정족산을 오른다. 연초록 산등성이가 따사로운 햇살에 점차 짙어져 간다. 마을을 지나 계곡에 들어서자 조잘거리는 물소리가 선명해진다. 인기척에 놀란 목쉰 꿩 한 마리가 적적함을 깨뜨리며 높이 날아오른다. 이끼를 둘러쓴 석축마저 무너진 황량한 절터에는 주춧돌과 깨진 기왓장이 널브러져 있다.

정족산은 험준한 산이 아니다. 철쭉 군락지를 뚫고 상투처럼 솟아오른 꼭대기를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아담한 산이다. 산세가 완만하고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져 어느 쪽에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곳곳에 습지가 많아 아무리 가물어도 계곡에는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한때 이 계곡에 한지 공장이 있었던 것도 사철 맑은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주위에 한지의 원료인 질 좋은 닥나무가 많아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최적지였다. 지금도 이곳을 종이 만드는 지소紙所라 부르는 어른들이 많다.

운흥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때 지공 선사가 중건한 큰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중창했지만 지금은 잡초가 무성한 절터만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는 각종 불경과 서적을 간행하며 승려를 교육할 정도로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다. 운흥사간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는 경판이나 경전은 양산 통도사 성보 박물관에 16673점이 보관되어 있다.

절도 스님도 없는 산골 폐사지廢寺地에는 적막감이 돈다. 온몸을 다 드러낸 주춧돌이 곳곳에 뒹굴고 석축이었던 검은 돌들은 돌무더기가 되어 있다. 지난 사연들을 덮어버린 무성한 잡초에는 스산한 기운이 깔려있다. 절터를 훑는 바람이 소쿠리 같은 능선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빙빙 돈다. 바람이 비질하듯 산기슭을 스치자 나뭇잎들은 자지러지듯이 몸을 뒤집는다. 누런 송홧가루가 봄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일제히 뿜어내는 꽃가루가 소나무 밑에 펴 놓은 자리에 노랗게 쌓인다. 해마다 가루를 날려 보내 솔방울과 씨앗을 만들지만 소나무는 점점 줄어든다.

사찰의 상좌는 불만이 많았다. 찾아드는 신도들이 반갑지 않았다. 스님의 뒷바라지만 해도 버거운데 불자들이 늘어나자 어느 날 절 입구 부채 바위의 사북을 깨버렸다. 쌀뜨물이 심 리나 내려갈 정도였던 절에는 신도의 발길이 끊겼고, 중들도 하나둘 떠났다. 인적이 사라지자 벌레가 들끓었고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자 축대도 기단도 힘없이 허물어졌다. 오래던 어느 방송사의 전설 따라 삼천리에 소개된 내용이다. 운흥동천雲興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부채 바위의 깨진 돌들이 근거 없는 전설이 아니라 말한다.

몇 해 전 절터를 발굴한 적이 있다. 감나무 밭과 잡목 숲이 되어버린 절터가 조심스럽게 파헤쳐졌다. 수백 년 동안 죽은 듯이 숨죽이던 땅을 조금씩 파 내려가자 수많은 유물이 얼굴을 내밀었다. 금당의 넓적한 주춧돌이 나오고 온돌방 구들장 아래 긴 방고래의 흔적이 나타났다. 암막새나 수막새 같은 기왓장은 수도 없이 나왔다. 크고 작은 부도와 석조石槽며 석탑의 기단도 모습을 나타냈다. 탑신을 찾지 못했지만 문양이 화려한 기단을 보면 상당히 화려현 석탑이 있었던 것 같다. 석등의 하대석 같은 복련좌대식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돌 부재들은 대숲에 누워 바람이 불 때마다 뭔가를 속삭인다.

큰 석조 하나가 폐 사지를 지키고 있다. 오랜 풍상을 이겨낸 고색창연한 석조가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윗부분이 손상되었다. 얼핏 봐도 행사를 끝내고 설거지할 때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모양이나 크기를 보면 종이 만들 때 닥나무 껍질을 불렸던 수조가 아니었을까 싶다. 화강암 석조는 운흥사의 내력을 다 알고 있겠지만 침묵하고 있다. 부처님 말씀이 경전이 되고 석탑과 불당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지만 끝내 말을 하지 않는다. 무너진 석축과 금당의 주춧돌처럼 말 없는 석조가 사색에 잠기게 한다.

석조는 장정이 들어가 목욕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크다. 검은 이끼가 도롱이처럼 어깨를 감싸고 있는 수조에는 낙엽이 제집처럼 자리 잡고 있다. 바닥에는 작은 배수구가 옆으로 뚫려있고 물이 차면 저절로 넘치도록 위에도 홈을 만들었다. 대나무를 타고 들어온 계곡물이 잠시 머물렀다 빠져 나갈 수 있게 한 것 같다. 물 드므처럼 물을 가두어 두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작은 나무 구유 하나 만드는 일도 예삿일이 아닌데 이렇게 깊게 파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기도 하다. 윗부분이 풍화된 석조에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 친친 감겨 있다.

천 명이 넘는 스님들이 종이를 만들었다. 행자나 동자승은 손이 닳도록 닥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물에 풀린 하얀 섬유질을 뜨는 물질은 경험 많은 스님이 담당했다. 석조는 어린 동자승의 갈라진 손등이나 말없이 물질하는 장인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구슬땀도 보았다. 말총으로 엮은 대나무발이 지통紙筒의 희멀건 닥풀 풀린 섬유질을 건지고 버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한지가 되었다. 종이를 만드는 물질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한지는 천년을 간다고 한다. 닥나무껍질에는 단단하고 질긴 섬유질이 많아 천연재료의 천과 유사한 성질이 있다. 아흔아홉 번의 손길이 간다는 하얀 백지는 자연의 질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조각한 목판의 검은 먹물이 한지 위에 번지면 부처님 말씀이 경전으로 되살아난다. 깨지고 부서진 석조 하나가 다 떠나고 없는 황량한 폐사지를 지킨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 선조의 명을 받고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지 고민하던 곳이다. 왜적의 본부가 있던 왜성과 멀리 않아 여기에서 협상을 구상했다고 한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머물고 있던 서생은 운흥사 석조의 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어디에서 발원한 물이든 돌고 돌아 만나는 곳은 같은 곳이다. 사람도 물처럼 한 곳에서 만난다. 계곡물을 따라가는 사명대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급하게 흐르는 계곡물이 잠시 숨을 돌린다. 속살이 훤히 보이는 작은 소에 하얀 구름이 모여들자 떠내려 오던 가랑잎도 잠시 쉬어간다. 발을 담그고 손이라도 씻어볼까 조용히 돌아선다. 언제나 낮은 곳을 찾는 물처럼 살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한줄기 바람이 풀잎을 스치고 지나간다. 처연함이 이끄는 침묵의 절터에 앉아 바람을 보고 물소리를 듣는다. 석조에 물이 차오르고 경전을 새기는 목판 다듬는 소리가 정족산 꼭대기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