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 정목일
겨울나무는 4B연필로 그린 누드 데생화….
속살을 드러내며 몸 전체로, 연륜의 체험과 사색의 깊이를 보여 준다. 허장성세와 허식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맞고 있는 모습은 면벽(面壁) 수도하는 성자처럼 초연하다. 겨울나무를 보면 추위를 견뎌낸 내공과 생존의 중심이 보인다.
겨울산은 녹색으로 꽉 찬 산이 아니라, 비움이 있어 속살이 환히 보인다. 나신(裸身)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상하좌우로 뻗은 나뭇가지들은 어느 나무나 기막히게 균형과 조화를 취하고 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도 반대쪽으로 나뭇가지들이 더 뻗어나가 균형의 미를 취한다.
겨울나무의 표정엔 인고의 침묵을 보인다. 색채와 향기는 사라지고 내면으로부터 고요와 엄숙감이 느껴진다. 색(色)을 벗어버리고 근육질의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바람 속에 관절염을 앓는 비명을 지르곤 하지만, 모든 걸 비워서 초연한 성자처럼 서 있다.
땅은 얼어붙었으나 나무의 모습은 바람결에 바리올린을 켜는 듯 겨울을 연주해 내고 있다. 겨울나무들은 골체미(骨體美)를 드러낸다. 좌우로 뻗는 가지들의 조화와 간결미가 기막혀서 눈이 삼삼해진다. 꽃과 열매로 성장한 모습에선 풍요와 성숙의 미를 보이지만, 겨울나무는 알몸 그 자체의 근원적인 미를 드러낸다.
겨울나무는 바람 속에 사색 중이다. 동한기(冬寒期)의 수도(修道)에 빠져 있다. 아무에게도 말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 침묵 속에 묵언정진(黙言精進)만 있을 뿐이다. 하늘로 치켜 오른 가지들의 근육과 힘살이 보인다. 겨울의 나무들은 바깥의 풍성함을 구가하는 게 아닌, 내면의 진실을 찾고 마음을 연마하는 중이다. 가지들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깊은 호흡과 내공을 보여 준다.
시골 마을 입구에 백 년 수령(樹齡)쯤의 느티나무 한 그루와 만난다. 가을이면 사방으로 짓붉은 단풍을 뿌려놓아, 선지피를 흘린 듯했다. 겨울엔 사방으로 전 갈래 만 갈래의 가지들이 드러내 놓은 어울림의 미학을 드러낸다. 어떤 폭풍이나 강설(降雪)에도 기울거나 꺾이지 않게 상화좌우가 기막히게 어울리고 있다. 나무만의 절묘한 균형 비법은 나무만이 터득한 오묘한 깨달음이 아닐까. 바람에 꺾이지 않게, 나뭇가지를 악기 삼고 바람으로 하여금 나무의 연주를 들려주게 만든다.
겨울나무 가지에는 시련과 인고를 견뎌내 추위와 바람 속에 움을 키워낸다. 움 속에는 꿈과 꽃과 나비의 날갯짓이 있다. 겨울의 눈보라와 추위가 있기에 성장하고 꿈을 키워간다.
가혹하다, 바람은 귀와 눈과 가슴을 마구 때리고 후벼 파며 이리떼처럼 덤벼든다. 나뭇가지 속에 얼기설기 지어놓은 생의 둥지를 볼 때, 경탄하고 만다. 벌거벗은 나뭇가지들 속에 덩그렇게 지어놓은 새집 한 채…. 나뭇가지 속으로 작은 나뭇가지들을 물어와 지어놓은 둥지는 얼마나 지탱할까. 세찬 바람결에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둥지는 을씨년스럽지만 정겹다.
새의 둥지는 나무의 중심점에, 조화의 한가운데를 택한 모습이다. 집이 나무 전체의 균형에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겨울 산의 비어 있는 여유와 사색을 본다. 나무들 속살의 아름다움과 내면을 본다.
나무 위에 지어진 생의 집, 따스한 등불을 하나 켜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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