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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지키지 못한 약속 / 함혜자

지키지 못한 약속 / 함혜자

 

 

 

막내야, 서울에는 참꽃이 없제? 도새골에 참꽃이 한창이구나.”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니 마치 빛 독촉 전화를 받는 듯 제 가슴이 쿵 내려앉습니다. 참꽃 흐드러진 도새골에서 해지는 줄 모르고 뛰어놀던 어릴 때 저를 기억해 내셨던 거겠지요. 도새골에 참꽃이 한창이라는 그 말이, 막내딸을 보고 싶다는 말이라는 걸 왜 제가 모르겠습니까만 그날도 여전히 못 가는 핑계거리를 찾느라 허둥댔지요.

엄마, 어쩌지. 나도 도새골에 참꽃 보러 가고 싶은데 시댁에 결혼식이 있네.’

엄마 역시 서운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황망히 전화를 끊어 버렸고, 전화기에선 어느새 냉정한 기계음만 뚜뚜 내 마음을 사정없이 헤집어놓았지요. 내 시야에 뽀야니 내려앉은 안개 때문에 난 한참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답니다.

늘 통화를 하다가도 끊을 때만 되면 어머니의 음성에선 쇳소리가 나곤 하였지요.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항시 머리가 조금 아플 뿐이라던 엄마.

저는 압니다.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는 것을요. 그러면서도 전 앵무새처럼 엄마 사다 드린 타이레놀 드세요, 하는 것이 내 최대의 효도인 양 하였던 일이 부끄러워 금방이라도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음 주에 갈게가 다다음 주가 되고 다다음 주가 몇 달을 넘기기 일쑤였던 지난날의 회한이 쓰나미가 되어 시시때때로 저를 덮쳐 옵니다.

아들 하나가 욕심이라면 반쪽이라도 주실 것이지, 누군가를 향해 애끓는 하소연을 하시던 모습을 보며 차마 침묵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 넷인 강릉집 엄마도 안 부럽도록, 아들 다섯인 신기집 엄마도 안 부럽도록, 아들 여섯인 댓골집 엄마도 안 부럽도록 열 아들 노릇할게, 정말이야, 꼭꼭.”

열 아들 노릇 할게, 했던 이 말은 영원히 잊고 싶은 말 중의 하나임을 고백합니다. 그때에는 인생이라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 뜻대로 살아가는 거라고 믿었던 철없던 때라고 변명할게요.

몸이 약한 저를 업고 이십 리 산길을 걸어 병원에 다니던 일 기억하시나요? 입이 짧아 잘 먹지 않는 저를 위해 된장과 채소를 머리에 이고 묵호항으로 생선을 바꾸러 가시던 엄마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어느새 제가 엄마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엄마, 엄마 모습만큼이나 이쁘게 가꾸었던 꽃밭이 있는 마당에서 다리 쭉 뻗고 앉아 한없이 울고만 싶은 제 심정을 아시나요. 혼자 몸으로 조롱조롱한 딸 다섯을 키워 내시던 고달픈 삶 속에서도 엄마는 늘 성서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지요.

오일장 북평 난전에서 고전을 사다 읽으시며 책 속의 그들과 함께 울고 웃던 선 고운 엄마가 그저 그리울 따름입니다. 착한 끝은 있다며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것으로 보아 권선징악과 해피엔드로 끝나는 그들의 삶 속에서 엄마의 밝은 미래를 꿈꾸었음을 저는 압니다. 짐작건데 창상의 몸으로 이겨내지 못했던 아픔과 상처가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로도 부족하다는 걸 저는 압니다.

엄마, 오늘 벌써 춘분이네요.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쌀쌀하지만, 또 어김없이 참꽃 피는 봄은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어마, 저번에 제가 갔을 때 거울을 못 봐 당신 습을 잊어버렸다고 하셨지요. 거울이 있으면 봉사자 선생님들 몰래 감춰놓고 보겠다며 해맑게 웃으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은 공주 거울을 사러 기분 좋은 외출을 하려 합니다.

올핸 도새골에 참꽃이 피었다고 전화하지 않으셔도 엄마처럼 이쁜 공주 거울 들고 곧 달려가겠습니다. 동화 속의 공주가 예쁜들 엄마만 할까요?

연 분홍색 동정이 달린 환자복을 입고 거울을 보며 화사하게 웃을 엄마의 모습을 그려보자니 제 마음은 벌써 참꽃 흐드러진 도새골에서 엄마와 함께 거닐고 있습니다. 엄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