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떠난 강가에 서서 / 허상문
강가에 서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엄숙해지고 가슴이 먹먹해 온다. 대체 저 강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흐르고 또 흐르며 어딘가로 떠나는 강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어제에 매달리지도 않고 오늘을 붙잡지도 않고 내일을 걱정하지도 않으며 무심하게 흘러간다. 지상의 모든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영광과 치욕을 다 안고 유유히 흐른다.
어린 시절, 강 근처에서 살던 나는 걸핏하면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곤 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기 바쁘게 아이들은 가방을 멘 채로 강으로 달려갔다. 어떤 친구들은 옷을 홀딱 벗고 강으로 뛰어들고, 어떤 친구들은 송사리를 잡기 위해 강가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지만 나는 늦은 시간까지 혼자 강가에 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인생의 고달픔을 알기 시작하면서, 학교에서 옆자리 여학생과 다투고 사랑의 아픔에 눈뜨면서, 서쪽 하늘에서 지는 노을은 왜 저리 붉고 서러울까 하고 생각하면서, 강가에 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강을 따라 세상을 마음껏 떠돌아다닐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 다짐을 실행이라도 하듯, 그동안 강과 함께 세상 곳곳을 많이도 다녔다. 시베리아횡단 열차를 타고 달려간 네바강, 제국주의자들에게 쫓긴 잉카족들의 마지막 피신처였던 아마존강, 아프리카인들의 심장이자 마음의 고향이라는 콩고강….
노을 지는 강가에서 얼마나 많이 눈물짓고 한숨지었던가. 그렇게 많은 국경을 넘나들면서도 함부로 낯선 항구에 정박하지도 않았고 어디선가 혼곤히 잠들지도 못했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면 수많은 경계를 넘어야 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만남에서 이별로, 어둠에서 빛으로. 무엇과 헤어지고 무엇을 만나러 떠난 것인가. 인생을 조금이라도 깨어서 살기 위해서는 그동안 걸어온 대로 눈감고 모른 척하며 살아 갈 수는 없었다. 가는 길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떠나는 어둑새벽의 시간을 기다리며 밤새워 뒤척였다. 여행에서도 삶이에서도 경계를 넘는 일은 힘들고 버거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강에는 경계가 없다.
강은 가득 찼다가 텅 빈다. 강은 물을 만들고, 물은 강을 만든다. 느리게 흐르지만 세상을 외면하거나 세상에 대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세상에는 관심이 없는 듯, 사람들과는 아예 아귀기 싫다는 듯, 저 혼자 잘난 체하며 앞만 보고 묵묵히 흐른다. 강은 머물러 있기보다는 늘 어딘가로 떠나기를 좋아한다. 뒷모습만 보이고 흘러가면서 말한다. ‘나도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라고 속삭인다. 그러면서도 어딘가로 떠나 누군가를 만난다. 나는 저 도저한 강의 흐름이 좋다.
강물에는 마침표가 없다. 방향도 모르고 길을 잃은 채 표류하면서도 그냥 흘러간다. 인생이란 항상 그렇다는 듯 고독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굽이쳐 흐르면서 인생과 세상을 경멸하며 절규하는 자들을 지그시 바라본다. 강물에선 물음표도 없다. 강이 평화로운 것은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가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의심 없이 그냥 흘러간다. 그러면서 문명과 역사를 만들고 인생과 사랑을 만든다. 삶이 고여 있을 때보다 흘러갈 때가 아름답듯이 강도 흘러갈 때가 아름답다.
한 문명을 탄생시킨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낯선 땅에는 늘 그곳의 특별한 풍경이 있다. 먼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모르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강의 깊은 의미를 찾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많은 강을 떠다니며 인간이 만든 문명과 역사와 사랑과 이별을 바라보며 경탄하고 한숨지었다.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와 세상을 호령하던 파라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넘실대는 나일강에 몸을 싣고 흔들리면서 저 위대한 문명은 인간이 만든 것인가 강이 만든 것인가를 물은 적이 있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그 옛날 어떻게 저런 문명을 일구어낼 수 있었을까. 나일강뿐인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인더스와 황하 강변에서 인간은 문명을 탄생시켰다. 문명을 만든 강가에서 나는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서성이며 전율했다.
템스 강가에 서면 서구 재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아 항상 우울했다. 워털루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런던의 안개는 영화 <애수>에서 만났던 슬픈 연인의 아름다운 낭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타락한 영혼 같았다. 인간은 평화와 번영을 말하지만 쉼 없이 남의 것을 빼앗고 전쟁을 저지른다. 인류의 역사는 침탈의 역사이다. 남의 땅을 지배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원주민을 살육했다. 그들은 승자가 되어 신상한 척 했지만 노예로 살아왔다. 자본의 노예, 수탈의 노예, 욕망의 노예, 그들의 낮과 밤은 그렇게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사랑을 나눈다. 오늘도 센강이 흐르는 미라보 다리에서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사랑을 다짐한다. 그렇지만 영원히 내 앞에만 서 있으리라 생각하던 사람은 사라진다. 끝내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하고 한 조각 처량한 흑백사진으로 남은 여인이 다리 위에 서 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강가에서 사랑을 잃은 여인이 홀로 울고 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영혼과 살고 언어를 함께 나누는 것, 그들의 사랑의 맹세는 강물처럼 허무하게 가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영원이란 없다. 강은 푸푸 한숨을 내쉬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한마디 위로도 없이 휘적대며 가는 강이 원망스러워 나도 한숨을 쉬며 뒤따른다. 모든 거짓 사랑은 가라! 저 강과 함께.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 알기 힘들지만, 6‧25전쟁 때 끊어진 다리 밑에서 사람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강을 건너면 사는 것이고, 강을 건너지 못하면 곧 죽음을 의미하는 상황이었다. 강을 가운데 두고 생사기로의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던 한강의 기억, 그 순간에서도 어떤 사람은 살아남았고 어떤 사람은 죽었다. 죽은 사람은 어두운 저승으로 떠났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지금도 한강 물살을 바라보며 꾸역꾸역 이승을 살아간다. 그들은 또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이이를 낳고 ‘기적’을 이루며 세상을 만들어 왔다.
강에서는 많은 사람이 울고 있다.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부다페스트의 머르기트 다리 아래에서 또 기막힌 사고가 일어났다. 애꿎은 수십 명의 생명을 앗아가면서 아름다운 강이 순식간에 죽음의 강으로 변했다. 대체 운명의 신은 왜 저렇게 수시로 참혹한 사고를 만들어 내는가. 모두 살아가고 있지만 죽음을 마주 보며 서 있다.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큰소리치며 살아간다. 아니면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에 아예 체념한 채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어느 순간 범람하듯 밀려오는 강물 같은 절망, 세상에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모두 소용없다는 것인가. 그렇게 체념하고 눈물지으며 살다가 떠나라는 것인가. 어느 강이 삶이고, 어느 강이 죽음인지, 강은 혼돈의 흔들림도 없이 푸르기만 하다.
인간이 신이 되지 않는 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아픔, 나의 슬픔, 나의 흔적, 이들을 다 흘려보낼 수 있는 곳은 강뿐이다. 삶은 한줄기 강이다. 하늘과 땅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듯이, 강도 그냥 있지 않다. 강 속에서는 물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는 삶도 죽음도 역사도 사랑도 함께 흘러가고 있다. 강의 막바지에 으르도록 나는 아직도 강이 얼마나 깊은지,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깨달음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오는 것이다. 사막에서 “사람들은 오아시스가 지평선에 보일 때 목말라 죽는다”고 한다. 강은 바다에 이르러 마침내 소멸한다. 지산의 이름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지나온 아픔을 어딘가에 기록하고,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다 내려놓고 소멸한다. 인생만큼 강도 허무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한순간일 뿐, 떠나면 그뿐, 결국에는 어딘가에 당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질 뿐이다.
비록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강은 보여준다. 어떤 아름다움이나 추악함도 세월이 가면 모두 한 조각 그림자로 남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떠도는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속절없는 시간과 덧없는 삶에 대해 탄식한다. 지금 무엇이 되어 있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 끝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의 가벼움과 누추함, 아무것도 없지만 무언가 있는 듯이 열심히 살아온 이 몸서리치는 윤회의 허망함을 강은 다 알고 있다.
내가 서 있는 땅 어딘가에서 강이 시작되었듯이, 그렇게 강은 끝난다. 강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되고 싶은 듯 자꾸 뒤돌아보며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지나간 시간도 다시 되돌리고 싶고, 떠나간 사람도 다시 만나고 싶다. 언제 다시 그 시간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가버린 물에 손을 씻을 수 없듯, 지난 강을 다시 회귀시킬 수는 없다. 나는 역류를 꿈꾸지만, 강은 역류를 꿈꾸지 않는다.
사랑도 증오도 이별도 이승에 있을 때나 하는 거다.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것들이 무어 그리 소중하고 아까우냐. 어차피 못 가져갈 것들 다 버려라. 찬란한 한날 봄 꿈 같은 그리운 것, 안타까운 것, 애달픈 것, 모두 다 흘려보내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이름도 부르지 말고 손수건도 흔들지 말고 다 떠나보내라. 돌아갈 수 없는 저 강물도, 강물 위에 떨어져 함께 흘러가는 저 꽃잎도 떠나면 모두 저승 아닌가. 모든 것은 결국 레테의 강을 건널 것이고 영원한 망각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이란 온통 아쉬움과 후회뿐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 우물쭈물하다가 미처 이루지 못한 일, 나를 용서하듯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 것, 끝내 잡아주지 못한 누군가의 손, 온통 아쉬움만 가득하다. 이런 아쉬움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강은 홀연히 흘러간다. 저 강의 무욕과 무심을 나는 경배한다. 한 세상 사는 일은 강 하나 건너는 일, 결국 모두 이 강에서 저 강으로 건너가야 한다. 강은 더불어 바다를 이룬다. 사람은 더불어 무엇을 이루는가?
모든 것이 고요한 침묵으로 빠져드는 이별의 시간이다. 강은 멈추어 선 자리에서 또 다른 풍경을 만든다. 나도 누군가를 향한 넓은 바다가 되고 싶고, 선연한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싶었다. 그대와 내가 강을 바라보며 멈추어 선 자리에는 아쉬움과 그리움만 자리 잡는다. 강은 우리를 젖게 하고 떠나 버린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강은 젖지 않는다. 우리만 젖을 뿐. 그렇게 젖어서 우리는 허물어졌다. 그래, 항상 그랬다. 그대는 너무 늦게 왔고, 나는 너무 일찍 떠났다. 강이 제 몸을 바다에 넘겨주고 떠나갈 때, 서쪽 하늘의 노을에 붉게 물든 새 한 마리가 한 세상을 접은 듯 어디론가 날아간다.
그동안 강을 바라보면서 너무 낳이 슬퍼하고 너무 많이 아파했다. 내가 강가에서 흐르는 강을 보며 슬퍼하고 있는 지금, 지상의 어디에서도 누군가 강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저문 강가에 앉아 그대 떠한 자리를 바라보며 눈물짓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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