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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환승 / 김현순

환승 / 김현순

 

 

 

 

예약한 3시에서 5분을 남겨놓고 병원 문을 밀고 들어선다. 벌써 이 치과에 드나든 지가 8개월째다. 70여 년 고락을 같이한 내 이()는 국보급이라고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튼튼했다. 허나 세월의 장수가 따로 있을까. 웬일인지 작년부터 어금니가 차례로 반란을 일으킨다. 말로만 듣던 소름 끼치는 치료가 시작된 거다. 시리고 찌릿찌릿하고 아프고 그 묘한 느낌은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어금니 4대를 빼고 의치를 해 넣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이 들 줄이야. 이제 그 공사가 끝나 월요일이면 완성이 된단다. 속이 후련하다. 돌아가신 시 어머님께서 이()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셨을 때 난 그 고통을 다 이해를 못했었다. 죄송한 마음이 새삼 든다. 속된 말로 남의 열병이 내 고뿔만 못 하다 더니 내가 건강했을 때는 나이가 들면 으레 이가 고장 나는 게 수순이려니 만 여겼던 나의 무심함이 민망했다.

언니! 부탁한 것 샀어.’ 치료를 끝내고 나오는 내 발목을 동생이 붙잡는다. 마치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는 것처럼 동생과 나는 늘 이렇게 보지 않고도 척척 통 하는 데가 있다.

그래? 고마워. 그럼 내가 지금 바로 너의 집으로 갈게.’ 나는 아직도 감각이 다 살아나지 않은 무거운 입술로 대답을 하면서 기쁨에 달뜬 마음은 꽃잎처럼 가볍다. 왜 이렇게 아직도 옷 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스스로를 심란하게 생각하다가도 막상 좋아하는 옷 앞에서는 그런 저런 생각보다 설렘이 앞장을 서는 나는 아직도 마음만은 소녀라고 노상 변명을 한다. 현명하게 선택만 잘하면 적은 돈으로 큰 기쁨을 주는 선물이란 게 옷에 대한 나의 주장이다.

며칠 전에 만난 동생이 입은 예쁜 회색빛 블라우스가 한눈에 맘에 들었다. ‘~이거 못 보던 새 버전인데.’ 내 감탄에 동생은 자기 아파트 양품점에서 샀다면서 원하면 사다 주겠노라고 신명을 냈다. 그만 두라는 동생에게 선불까지 쥐어 주면서 꼭 그 블라우스를 사 오라는 약속을 다짐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는 습관처럼 고소를 삼켜야 했다. 김 여사! 오늘도 지고 말았군요. 당신 옷장에 블라우스가 지금 몇 장이나 들어 있는지는 알고 있나요? 그 대신 다른 것에서 낭비하는 일은 안하잖아. 시큼한 자기 혐오감을 나는 그런 변명으로 얼버무렸다.

찔끔거리는 빗줄기를 비집고 내려 쬐는 해 빛이 여간 뜨겁지 않다. 가로수 한 그루 안 서 있는 정류장이 삭막하기 그지없다. 어서 버스를 타자. 가만! 환승을 하자면 버스 번호를 잘 기억해야 한다.. 같은 번호로 다시 타면 환승이 안 된다는 걸 잘 기억할 일이다. 이 제도가 생겼을 때 잘 몰라서 몇 번인가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서민들의 호주머니에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는 이 제도가 참 고맙다. 작은 900원이라는 돈이 주는 알뜰함을 아마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다 잘 알 거다.난데~그거 가지고 아파트 앞으로 나와.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게.’ 총알같이 달려 나오는 동생을 보며 반가워서 절로 웃음이 나온다. 어제 만나고 그제 만나고, 또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도 만날 때마다 반가운 우리. 구실이 있든 없든 만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동생을 따라 아파트단지로 들어가니 풍성하게 장이 서 있다. ! 오늘이 화요일? 알뜰시장이 서는 날이구나. 급하게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채소며 생선 등등 몇 가지를 샀다. 옆에 있는 동생 몫을 챙겨주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은 것처럼 불이 나게 일을 보고 버스 정류장으로 되돌아가는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침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저 만치서 오고 있었다.

저걸 타야 해! 그러기엔 좀 무릴 것 같다. 어쩌지? 뛰자!’

생각과 뜀박질이 동시에 일어났다. 살 때는 별 무게를 느끼지 못했는데 어찌 이리도 무거울까? 게다가 그동안은 한 번도 멀다고 느끼지 않았던 이 거리가 오늘따라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대책 없이 땀이 흐른다. 줄기가 되어 흐른다. 숨이 턱에 닿는다.

마침 하교시간이라 세 그루학원에서 많은 학생들이 우르르 밀려 나오는 것이 보인다. 됐어! 그래 너희들이 다 탈 때 까지면 난 시간을 벌 수가 있으니까. 헐레벌떡 버스에 올라타서 버스카드를 대니 환승입니다.’ ! 이겼다. 나 혼자 땀에 범벅이 된 얼굴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이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 조바심을 쳤던 30년 동안의 내 행적이 지나 놓고 되돌아보니 치졸하기 짝이 없다.

마음에 드는 옷을 살 때는 현명하게 선택만 잘하면 적은 돈으로 큰 기쁨을 주는 선물어쩌고 해가며 자기 합리화를 시키면서 환승이 되면 얻어지는 돈 900원에 목숨을 걸고 이 시원찮은 다리로 달리기까지 해? 비아냥거림이 마구 쏟아진다. 그건 사안이 다른지! 쓸 때, 안 쓸 때, 절약할 때를 가려서 살자는 거지! 어느 틈에 차분해진 내 이성이 조목조목 따지며 나선다. 말이 된다. 그러면서 바로 며칠 전 어느 교수님의 강의 내용이 떠올랐다.

 

삼여(三餘)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하루는 저녁이 여유로워야 하고// 일 년은 겨울이 여유로워하며/

일생은 노년이 여유로워야 한다.

 

정신이 번쩍 든다. 너무 억 매지 말고 조급 하지 말고 뒤뚱뒤뚱 뛰지 말고 나이에 어울리게, 우아하고 풍요로운 미소 안에서 품격 있게 살자. 나는 삼여를 한 도막씩 또박또박 가슴 안에 다시 새겨 넣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행복의 기준은 달라도 여유로운 마음이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삼각산으로 넘어가는 해님이 내 말에 동조하며 살포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