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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사계절 연습​ / 우희정

사계절 연습/ 우희정

 

 

 

 

묘한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그 분위기를 만끽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그곳을 찾는다. 공존하는 사계절을 즐기러.

대리석 계단을 스물네 개 올라서면 내 키의 세 배는 됨직한 육중한 나무문이 앞을 턱 막아선다. 그 문은 일본의 에도 황궁 전안문(田安門)처럼 쉽게 열리길 거부하는 느낌이다. 문에 비해 아주 작은 노란 금속 손잡이를 힘껏 당긴다. 마음속으로 ‘#열려라 참깨 를 외면 견고하고 묵직한 문도 어렵지 않게 열린다.

열림과 동시에 둥근 돌을 쌓아 올린 원탑이 강한 흡인력으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원탑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늘어진 여러 갈래의 가느다란 나뭇가지엔 총총히 별이 달린 듯 노란색과 붉은 물감 들인 은행잎들이 손을 내젓는다. 어서 가을 속으로 들어오라고.

왼쪽에는 크기가 각각 다른 사슴 열댓 마리가 점점이 땅에서 출발하여 함박눈 날리는 하늘로 비상해 오르고 있다. 한 발짝 다가서면 화이트크리스마스의 들뜸과 어우러질 수도 있다. 덩달아 내게도 꿈의 날개는 돋는다.

건너편에는 달걀모양의 하얀 공이 덩굴나무의 가지에 조롱조롱 달려있어 백목련인 듯 화사하다. 그 아래 차탁 가장자리에 꽂힌 아네모네와 어울려 그곳은 또 한창의 봄이다.

테이블을 몇 개 지나면 어른 두엇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옹기 항아리를 지주 삼아 용틀임치는 마른 가지에 군데군데 꽂힌 장미꽃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다. 촘촘히 들앉은 꽃으로 인해 한여름 날의 정열이 넘친다.

잠깐 사이 가을, 겨울, , 여름을 차례로 음미하고 나는 옆방으로 들어간다.

약간 어두컴컴한 골방으로 들어서면 긴 벽을 따라 내려친 검은 커튼에 도드라진 붉은 장미문양의 자수와 그 장미를 비추는 작은 알전구가 선뜻 눈에 띈다.

아래쪽 길다란 탁자 위에는 희고 가는 실철사 같은 것들이 세워져 있기도 하고 엉켜있기도 하다. 수많은 가닥들이 흩트려져 있는 것이 무언가 궁금하여 눈여겨보면 쉽게 가는 면발의 마른 국수라는 걸 알 수 있다.

가운데 놓인 탁자 주위는 온통 꽃무덤이다. 한 아름의 꽃이 듬뿍 담긴 아래 위의 넓이가 같은 긴 화병, 그 화병의 아래쪽 테두리를 둘러싼 시든 꽃, 막대모양의 탁자 다리를 따라 내려가면 바닥에도 마른 꽃잎이 소복하다. 이곳은 온 실내를 꽃천지로 꾸미기 위해 많은 양의 꽃을 사들이지만 꽃이 시들었다고 그냥 버리는 법이 없다. 시든 꽃은 시든 대로 활용 하다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 바닥에서 남은 향을 뿜는다. 그 향기에 끌려 나는 때때로 상자 속 같은 승강기에 들기를 자청한다.

이 집 주인의 상상력은 가히 파격적이다. 어쩌면 그것은 정칙에 대한 도전이며 일탈일 것이다. 기발한 발상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양하게 변모하여 언제나 신선한 충격을 준다.

늘 나는 내 행동반경의 좁음과 상상력의 빈곤을 느끼곤 한다. 그럴 때면 이 집의 분위기에 파고들어 스스로를 달군다. 향기로운 허브차를 맘껏 마시고 밤새 내 몸에서도 향내가 절로 뿜어나길 바라는 철없는 꿈마저 꾼다.

오늘 내 눈길을 끄는 것은 탁자 위의 고급 숄이다. 아무렇게나 겹쳐 놓은 숄이 아까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어우러져 내는 묘한 분위기를 값으로 따진다면 이보다 더 경 제적일 수가 없을 듯싶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의 촛불로 두 개의 불빛을 음미할 수 있도록 유리창 앞에 놓은 효율성이라니. 키 낮은 촛불의 어스름한 분위기, 로얄코펜하겐 접시에 담긴 달콤한 케이크나 초콜릿 한 조각이 나의 감성을 완전히 자극한다.

벽에 걸린 달과 별이 무늬진 밤색 등잔이 터키의 운명처럼 깜박인다. 터키의 국기를 닮은 등잔을 보며 또 다른 세계로 나는 지금 이 집 특유의 음악을 따라 여행을 떠나려 한다. 가자, 우리 함께 상상의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