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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굴욕 / 송혜영

굴욕 / 송혜영

 

 

 

불온한 방문자다. 검정색 운동모자를 눈썹까지 눌러쓴 남자가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선다. 예고도 양해도 없이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오는 듯 태도에 거침이 없다. 잔디밭을 뒤덮은 시든 꽃다지를 거두다 말고 엉거주춤 엉덩이를 일으킨다.

"고물 없어요?"

사포처럼 거친 목소리다. 거두절미, 용건으로 바로 치고 들어온다. 정체를 밝힌 남자의 시선이 집 전체를 빠르게 일별한 후 잡동사니를 쌓아 놓은 헛간으로 향한다. 내가 미처 발을 떼기도 전에 남자는 건들거리며 손끝으로 헛간에 있는 물건들을 함부로 집적거리고 있다. 고물상이라 통칭하는 집단의 일반적인 영업 방식과 사뭇 다르다. 폭력에 기대어 사는 치들이 상대를 제압하고자 취하는 포즈와 비슷하다. 그의 무례가 무참할 만큼 깍듯하게 예를 갖추며 묶어 놓은 책 무더기를 가리킨다.

"책도 가져가시죠?"

이것만 가지고 내 영역에서 빨리 나가라는 뜻이다.

"그럼요. 뭐든 가져갑니다."

말꼬리를 길게 빼며 남자가 책을 헛간 밖으로 거칠게 던진다. 내 의도와 그의 욕망이 상충한다는 표시다. 당신도 여차하면 이렇게 패대기칠 수 있다는 암시 같기도 하다. 순간 같잖은 폭력에 저항하고자 하는 오기가 꿈틀한다. 남자는 기류만으로 내 속을 읽었나 보다.

"제가 한 십 년 빵에 갔다 왔거든요. 마누라는 도망가고 애새끼는 지 할머니가 키웠죠."

자기 신상을 힘 있는 문장으로 요약 정리한다. 공포심을 배가시켜 저항의 싹을 자르려는 포석이다. 아니면 동정심에 호소? 수를 읽다가 모자챙 그늘 속 날카로운 눈과 마주친다. 폭력이 단지 포즈가 아니라 온전한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일깨워 주는 눈빛이다. 지금 집에 나 혼자라는 사실도, 애써 참고 있었던 무섬증이 왈칵 인다. 단순히 폭력에 경도된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일 수 있다. 뒤늦게 눈에 들어온 각진 턱, 다부져 보이는 어깨도 기를 꺾는데 일조한다. 내가 흔들린 걸 눈치 챈 게 분명하다. 그는 때를 놓치지 않는다.

"이거 버릴 거죠?"

필요한 사람 있으면 주려고 내놓은 구형 오디오에 손을 댄다.

"! ! 뭐 가져가세요."

턱없이 비굴해진 말투에 스스로 놀란다. 오디오를 제 것인 양 들어내는 남자의 등에 대고 안 해도 될 말을 한다.

"어머니가 혼자서 애 많이 쓰셨겠네요."

친밀감을 드러내는 건 잠재적 폭력에의 굴복을 의미한다. 남자는 대꾸도 안하고 돈 되는 물건을 고르고 있다. 은연중 함구를 명받은 나는 그의 신속하고 명확한 작업을 다만 지켜본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연통이, 기름칠해서 다시 쓸 요량이었던 난로가, 바비큐용으로 개조하려던 드럼통이 헛간을 나온다. 고물 판정의 전권은 이미 그에게 넘어갔으니 고물이 되어 끌려가는 그것들을 속수무책 바라볼 뿐이다. 경제성 검토와 흥정의 필수 과정인 번거로운 실랑이가 생략되면서 그는 시간도 번 셈이다. 목장갑을 벗어 탈탈 털면서 남자가 작업 마무리를 한다.

"나는 고물 주우러 다니지만 울 아들은 S대 법대 다닙니다."

"? ! ! 정말 자랑스러우시겠네요." 장단을 맞춰 준다.

내 열등감을 자극해 자존심도 알뜰히 챙긴 전과자 고물상이 당당히 대문을 나선다. 안녕히 가시라고 비루하게 인사까지 올린다.

'크어엌푸더더더덩덩."

낡은 1.5톤 트럭에 시동 걸리는 소리가 해방의 나팔 소리로 들린다.

긴장의 끈이 풀리자 그가 고물을 가져갈 때 치르는 통상적 답례품인 뻥튀기 한 됫박, 빨래 비누 한 장도 안 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물 수집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고물상의 야비한 수작에 당했다는 것도. 밑진 건 '끽휴시복(喫虧是福)'의 정신으로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기초적 심리 전술에 쉽게 무릎을 꿇은 욕된 기억은 뇌 속 해마(海馬)에 오래 머물러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