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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가정 실습 / 김순경

가정 실습 / 김순경

 

 

 

현장 실습은 아르바이트와 다르다.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산업 현장에서 실무를 배우는 과정이다. 오랫동안 배웠던 지식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체험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이다. 세상과 마주치며 홀로서기를 준비하다 보면 적잖게 긴장한다.

실습생은 정확한 업무가 없다. 보조 역할에 정당한 대가마저 받지 못한다. 최저임금 수준으로 계산해 주는 곳도 있지만 아예 한 푼도 주지 않는 회사도 있다. 오히려 병원 쪽은 돈을 내고 실습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해마다 제자들의 실습을 챙기다 보면 힘들었던 농촌의 가정 실습이 생각난다.

바쁜 농사철이 다가오면 23일 정도 농사일을 도왔다. 그때쯤이면 어른들은 가정 실습을 언제 하는지 날마다 물었다. 허수아비도 일을 돕는다는 농번기가 되면 아이들은 학교가 아닌 들로 나갔다. 어린아이들은 동생을 돌보거나 새참 심부름을 하지만 상급생은 논에서 일을 했다. 봄에는 보리 베기와 타작을 하고 모내기를 거쳐 가을에는 추수를 마치고 보리 가는 일을 했다.

모내기철은 전투였다. 밤낮이 따로 없다. 모내기와 겹치는 보리 수확기는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제때 모내기를 하려면 보리부터 베야 한다. 장마가 일찍 찾아오면 수확을 앞둔 보리는 썩거나 싹이 나서 먹지 못한다. 그렇다고 덜 여문 보리를 미리 벨 수가 없으니 아무리 급해도 누렇게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늦봄의 따가운 햇볕이 없으면 보리는 여물지 않는다. 겨울을 이겨낸 보리가 봄기운을 받으면 짙은 초록 줄기가 힘차게 뻗어난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긴 보리 수염은 왜 그렇게 까칠한지, 어쩌다 옷에라도 붙으면 움직일 때마다 안으로 파고들었다.

논일을 마쳐야 모내기를 한다. 수확한 보리논을 갈아엎어 물을 잡고 개펄처럼 부드럽게 써레질을 하는 논일은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모두 소의 몫이었다. 논일을 제때 마치지 못하면 수십 명의 모내기 일꾼이 그냥 논두렁에 물러앉아 기다린다. 품앗이가 대부분이라 한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순번이 올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달빛에 울려 퍼지는 개구리의 합창을 들으며 무논을 다루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의 농부라면 누구나 목숨줄 같은 농사일을 힘든 줄도 모르고 해내었다. 그러니 농부의 아들들도 대를 이어 농사짓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가을에도 그랬다. 벼를 베고 단을 묶어야 타작을 한다. 발로 밟는 탈곡기는 회전속도가 떨어지면 탈곡이 되지 않는다. 잘못하면 볏단에 딸려 들어갈 수 있어 다리만 들이밀어 회전속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밟는 것을 도왔다. 탈곡기가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볏단을 앗아 주고 짚단은 치웠다. 돌아가던 탈곡기가 한 번 멈추면 다시 돌리는 데는 큰 힘이 들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시작된 타작은 어두워도 계속되었다. 마당 가득한 볏가리가 없어져야 저녁을 먹었다. 타작하는 날은 흰쌀밥에 겉절이 같은 배추김치와 생선 반찬이 나왔다.

일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다. 일할 논이 없거나 머슴이 많은 집이었다. 우리들이 부모를 따라 논으로 나갈 때 공놀이를 하거나 책을 보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아직 적응도 안 된 낫질을 하다 손가락 베는 일은 다반사였고 때로는 다리에 상처를 입을 때도 있었다. 무턱대고 병원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송진 가루나 갑오징어 뼛가루로 지혈을 시키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는 작은형님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다. 큰형님은 이미 도시로 나가 취업을 준비하느라 집에 없었다. 그림자처럼 형님을 따라다니며 농사일을 배우고 도왔다. 힘든 쟁기질이나 볏가리 쌓는 일은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논일을 배웠다.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나 출타 중인 아버지를 믿을 수가 없어 할아버지가 일머리를 틀어주면 그대로 따라했다.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법과 같았다.

나는 가정 실습이 싫었다. 날마다 농사일을 도왔지만 머슴처럼 일하기는 싫었다.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는 벼 베기나 한 번 물에 들어가면 몇 시간 동안 방아머리처럼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하는 모내기가 더더욱 싫었다. 서른 마지기 가까운 적지 않은 농사를 작은형님과 다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 할아버지가 지시를 했지만 짜증은 어머니한테 부렸다. 그래 봐야 변할 게 없는 줄 알면서 혼자 투덜거렸다.

고향을 뜨면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이었다. 도시로 나왔지만 주말마다 농사일을 하러 갔다. 평소에는 각자의 일을 하다가도 주말만 되면 형제들은 고향집에서 만났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가마솥에 추어탕을 넘치도록 끓이셨다. 쌀을 찧고 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도 담아 두었다. 한때는 아무리 힘들어도 주말만 되면 연어처럼 고향을 향했다.

이제는 농사일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흩어져 있는 논밭이나 헛간의 농기구는 그대로지만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일머리를 틀어주던 할아버지와 자식을 기다리던 아버지도 없고 같은 차로 오가던 형님들도 농사가 없는 세상으로 가신 지 오래다. 어떤 짜증도 다 받아주던 어머니가 없는 고향집에는 빈집을 지키는 늙은 홰나무만 겨우 숨을 내쉬고 있다.

가정 실습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집에서 실제로 응용하고 익히는 학습이다. 학교에서 배운 새로운 지식과 살아가는 방법을 삶의 현장에서 다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농경시대에는 농사일이 주업이라 농번기를 통해 가족들과 직접 농사일을 배우도록 했지만 지금은 산업화 시대라 기업체에서 실무를 익힌다. 논에서 하던 실습을 산업체에서 하고 있다.

사람은 평생 배우며 살아간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농사만 짓던 시대와는 다르다. 현대인들은 학교에서만 익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찾아가서 원하는 것을 배운다.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교육을 넘어 미뤄뒀던 하고픈 공부도 한다. 이론과 실무 경험으로 느지막이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 내 친구가 여럿 보인다. 목수 일이나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 서예나 주역을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가정 실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세탁기나 밥솥을 들여다보지만 정작 할 줄 아는 게 없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슬며시 걱정이 된다. 이러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밥솥의 증기가 더욱 세차게 뿜어져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