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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돌아온 이발사 / 김상영

돌아온 이발사 / 김상영

 

 

 

 

집안의 내력이라 머릿결이 뻣뻣하여 잘 눕지 않은 나는 장발의 낭만을 애당초에 포기한 체 스포츠머리를 줄기차게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 후 시골에 들앉고 보니 도시의 화려함과 함께 수십 년 단골이발소도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미장원의 기세에 눌려 내리막길에 들어선 요즘의 이발소들인지라 짧은 머리를 제대로 손질할 수 있는 재간꾼이 드문 실정이다. 더구나 내 삐딱 머리의 균형을 맞출 이발사를 찾는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점이 가까이 있으면 끼니마다 행복하듯, 맘에 드는 이발소가 있으면 생활의 복이 아닐 수 없다. 왕복 백 리 길인 처남의 단골이발소로부터 삼십 리 읍내에 이르기까지 훑어 내려온 끝에 발견한 문걸이네 이발소가 딱 그런 집이다.

문걸이네 이발소란 딱히 상호가 없어서 내가 붙여본 이름인데, 그 허름한 집이 이발소임을 알리는 것은 슬레이트 처마 밑 시멘트벽에 빌붙어 번쩍이며 돌아가는 삼색등뿐이다. 허름한 문짝을 열고 들어서면 엷은 연탄가스가 싸구려 비누와 화장품 향기에 뒤섞여 그야말로 시골이발소다운 냄새를 풍긴다. 낡은 이발의자 세 개는 저마다 거울과 마주 앉아 손님 뜸한 세월을 죽이고 있다. 그렇다고 몇 대를 이어 내렸다는 변두리 서울의 그 케케묵은 이발소를 떠올리며 낭만에 젖지는 말아야 한다.

시골구석이라고 편리함을 포기한 채 옛것만 끼고 살란 법 있다더냐. 옛날식 바리캉은 전기이발기로 바뀌었고, 혁대에 비벼 까르르 날 세우던 일자형과 함께 안전면도기가 자리를 잡았지만 변화는 그걸로 땡이었다. 파리똥 듬성한 천정에 이마를 박은 채 내려다보는 누리끼리한 허가증을 보아하니 나잇살이나 먹어 육십 고개를 깔딱 넘은 줄 알겠다. 손바닥만 한 고물 텔레비전은 갈 때마다 월척 타령을 해대니 그가 낚시꾼인 줄 짐작 게 한다. 맞은편 벽에 철썩 붙어 있는 대진표 쪼가리를 보자 하니 테니스회원인 줄도 알겠다.

평생 직업에서 손을 털기엔 일생일대의 어려운 결단이 필요하다. 문걸이네가 사십 년 일터를 포기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된 건 생활고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농촌 인구는 줄어드는 터에 좁은 면 소재지에 이발소는 두 군데가 되고 보니, 맞벌이에도 불구하고 밥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게다. 처가 식구가 있다는 그곳에서 무얼 해 먹고 사는지 싶어서 측은지심이 들었지만, 머리는 어디에 맡길까 내 코도 석 자였다.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머리는 자라 올랐다. 문걸이가 떠난 뒤 달포가 지날 때까지 적당한 이발소를 찾지 못하여 더벅머리로 쏘다니던 즈음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 웬 뚱보 이발사가 개업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옳다구나, 어떤 화상인가 싶어 슬며시 가보게 되었는데, 과연 피둥피둥 살이 올라 둔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배불뚝이 엉덩이에 가죽 혁대가 삐딱이 걸린 모양이 서부의 총잡이 페르난도 산초를 닮은 듯 자못 비장하고 그럴듯하게 보였다. 혁대엔 권총집처럼 생긴 주머니와 고리 몇 개가 달려있고, 빗이나 가위가 꽂혀있다. 발을 옮겨 디딜 때마다 그것들이 쩔그럭거려 귀에 거슬렸으나 싫은 내색을 삼갔다. 충고로 반감을 사기보다는 그저 그러려니 인정하는 게 사람살이가 아닌가 싶어서다. 그래, 빛 좋은 개살구라도 어쩔 수 없지. 문걸이를 아쉬워하며 맞춤을 거듭한 끝에 억지 단골이 되었는데, 1년을 못 채우고 소리 소문 없이 가버렸다.

이발비 팔천 원에 이천 원을 더 얹어 준 것은 오래오래 있어 주길 기대하는 맘 때문이었는데, 이런 꼴이 다 있나. 떠나기 며칠 전에도 머리를 맡겼지만 간다 온다 말이 없었다. 아무리 뜨내기라지만 인사나 하고 가면 누가 할퀴나, 못난 사람이다. 그러면 또 어찌해야 할까. 옳지, 떠벌려야 약이 나온다고 더벅머리 타령을 했더니 이웃들이 읍내 이발소를 일러준다.

내일 갈까 모레 갈까 벼르던 어느 날, 아이고 얄궂어라! 문걸이네 이발소의 삼색등이 다시 돌고 있는 게 아닌가. 돌아온 문걸이는 수척했으며 겸연쩍어하였다. 나는 그런 그가 안쓰러워 사랑 고백을 하였다.

보소, 난 이날 이때껏 딴 덴 안 갔구마는, 뚱보아제가 왔을 때도요. 쫌만 늦었으마 읍 쪽으로 갔을 진 모르지만.”

, 가 보제 그랬니껴. 이 맛 저 맛 쫌 보제요 하하.”

말은 그리하였지만 흐뭇한 표정이다. 장날이라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더벅머리를 그에게 맡기곤 엷은 잠에 취하였다.

아이고, 도만 닦지 말고 잘돼가나 쫌 보소 와.”

아이고, 뭐 그 까이꺼, 솜씨야 녹슬었을까, 되는대로 깍아뿌소 마.”

부산 가서도 어려운 시설에 이발 봉사를 해 왔다는 말을 귀결에 들은 바도 있어 마음을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40년 묵은 손이 근질거려 어찌 참았을까. 과연 그러하였다. 스리 살짝 밑 돌린 그는 째깍째깍 가위와 빗을 교묘히 놀려 아담하게 깎아 세웠다. 면도는 또 어떻고, 뚱보의 솥뚜껑 손보다 그의 손은 섬세하고도 보드라웠다. 입술을 손톱으로 따끔하게 집어 올리는 뚱보에 비하여 손수건을 얹어 살짝 당기는 면도 솜씨 봐라.

옛소, 잔돈은 필요 없응께.”

, 이천 원 어치만큼 더 신경 쓰라는 이바굴세.”

맞구마, 말 하마 숨 가뿌제.”

껄렁한 덕담에 차례를 기다리던 이웃들 표정이 덩달아 환해졌다. 흐뭇한 정경을 줄곧 지켜보고 섰던 문걸이네 집사람이 얼른 서비스 커피 한 잔씩을 돌렸다.

문걸이네 이발소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내가 제의한 건배 선창에 따라 쏟아지는 박수는 공연장처럼 힘찼으며 길게 이어졌다.

내 삐딱 머리를 통째로 내맡기고 엷은 잠에 취해보는 문걸이네 집은 그 얼마나 따스하였던가. 싸구려 냄새는 아련한 향수를 일깨우며, 구수한 커피 한 잔은 사람 사는 정이었지. 돌아온 문걸이는 언제나 그곳에서 더벅머리 손님들을 반겨 줄 것이다. 느긋한 내 맘처럼 너른 들판에 푸근히 눈이 내려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