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 / 이상규
신문을 읽는 새벽 화장실은 나의 은밀한 공간이다. 인기척 없는 어둠 속 불빛 아래 상큼한 잉크 냄새가 종이 위에 삶의 모습을 펼친다.
어느 날 아침 쪼그려 앉아 신문을 넘기는데 흰 타일 바닥에 뭔가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작은 벌레였다. 순간 피부가 근질근질했다. 구석진 바닥에 납작 엎드려 기어가고 있는 놈은 길이가 1.5센티쯤 되는 노래기 종류였다. 서두르지도 않지만 그렇게 느림보도 아니었다. 읽던 신문지를 접어들고 내려치려다 멈췄다. 어떻게 하나 좀 두고 보고 싶어졌다.
녀석은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이 바로 앞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날려가지 않을 정도로 입바람을 살짝 불어보았다. 순간 놈은 멈칫하더니 살기를 느꼈는지 양쪽 더듬이를 쫑긋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잠시 그런 자세로 있더니 더 이상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듯 다시 움직였다. 고르지 못한 타일의 틈새를 잘도 넘어갔다. 막다른 문짝 앞에 이르자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너무나 천연덕스러웠다.
양쪽에 달린 십여개를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서 벽에 세워둔 빗자루를 넘더니 이번에는 내가 앉은 방향으로 다가왔다. 제 죽을 줄도 모르고 겁도 없이 전진하다니. 가랑이 사이로 오면 발을 굴려서 쫓아버리거나 밟아 버려야 할텐데, 난감했다. 그런데 다행히 내 그림자 안으로 들어오더니 방향을 트는 것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살생을 한다는 건 부처가 아니더라도 원치 않는 일이니까. 잠시 후 세면대 밑동 오배수관 속으로 몸을 비비고 들어가더니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졌다.
집 안에 벌레들이 꽤나 우글거리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연갈색 푸석한 날개를 가진 바퀴벌레가 그중 가장 흔하다. 통통 튀는 모습은 참새가 걸어가듯 가볍지만 날아갈 때는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매미처럼 재빨라 시선이 따라갈 수가 없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다가 먹이를 구해서는 훌쩍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도 뭔가에 덧걸렸는지 하늘을 향해 여섯 개의 다리를 쩍 벌리고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체도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놈에게도 삶이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새끼 물방개비 같은 까만 벌레도 간혹 기어 나온다. 누가 옆에 있든 아랑곳 없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방 한가운데를 하염없이 기어간다. 느림의 삶을 몸으로 보여주려는 것이 인도의 수도승을 연상케 한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냥 지나가는 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다.
요즈음은 지그재그로 원을 그리며 웽 하고 날아디니던 파리 족속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아파트 생활 주변이 청결하다 보니 먹을거리가 별로 없어 다른 곳 쓰레기장을 찾아다니나 보다. 한더위에 공중을 날다가 폭격기처럼 날쌔게 피부에 내려앉아 순간 피를 빨아먹던 모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재래식 살상 무기인 파리채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내 생활 주거지가 그들의 생태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그놈들은 내 눈에 띄지 않는 주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게다. 새벽에 내 앞에 나타났다가 오배수관 속으로 사라진 노래기는 거기가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집세는 내가 내는데도 바퀴벌레와 새끼 물방개비는 이곳이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겠지. 그렇다면 우리 집은 다가구주택이 아닌가. 문득 우리 집이 공동생활체라는 생각이 든다.
소파에 기대어 한가로이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방바닥에 제법 큰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시커먼 몸덩이에 거북이 같은 까칠한 등껍질이 방탄조끼같이 탄탄한 느낌을 주었다. 털이 삐죽 솟은 긴 다리의 바늘에 찔리면 금방 피가 쏟아질 것 같아 섬뜩했다. 때려잡으려다 놓치기라도 하며 코너에 몰린 놈이 굶주린 멧돼지처럼 외려 공격해 올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왔다. "노상 사나이를 읊조리면서 벌레 한 마리 잡지 못 하고…." 하고 비아냥거리는 아내의 눈길이 등 뒤에 따가웠다. 그래도 그냥 보내주는 것이 살생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하는 다문화 가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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