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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꽃분홍 브래지어 / 정재순

꽃분홍 브래지어 / 정재순

 

 

 

분홍빛 레이스 사이로 스와로브스키 물방울이 영롱하다. 꽃분홍 브래지어가 나를 감싸 안을 때면 마음은 한 송이 꽃처럼 화사해진다.

진열된 속옷들을 눈여겨 살피는데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발가벗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전신을 드러내고도 거리낌 하나 없이 나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마네킹이 두른 브래지어는 나이로나 취향으로나 나와 어울릴 건더기라곤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따라 예뻐 보여 눈길이 갔다. 여태껏 붉은 색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건만 꽃분홍이 자꾸 나를 붙들었다. 세월이 더 흐른다면 이리 고운 속옷을 입기는 힘들지 않을까.

한때는 가녀린 몸이었으나 원하지 않아도 늘어나는 나이처럼, 조금씩 불기 시작한 군살이 허리에 묵직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몸에 위로를 해 주고 싶은 심사가 꿈틀거렸다. 결국 꽃분홍 브래지어를 집어 들고 말았다.

여자들은 여름이 가까워지면 속옷에 신경이 쓰인다. 요즘처럼 목선이 많이 패인 옷이 유행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아차 하면 브래지어의 어깨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꽃띠 아가씨들이야 젊음만으로도 충분히 자체 발광이겠지만 아줌마들은 그렇지 못하다. 은근슬쩍 드러나는 가느다란 어깨끈 하나에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달라진다. 찌들은 흰색 끈이 보이면 같은 여자일지라도 그만 민망해지는 것이다. 스킨이나 아이보리 색이면 무난하건만 왠지 싱거운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오래 전에는 브래지어가 단지 일하기에 편하도록 몸을 감싸는 기능을 했으나, 요즘은 몸매를 보정하고 실루엣을 살려주는 역할이 더 크다. 브래지어가 패션이 된 것이다. 올록볼록한 겨드랑이와 등살을 정리해 주는 스포츠 브래지어, 호크가 앞으로 붙은 프런트, 컵만 두 개 달랑 있는 누드, 어깨를 확 드러낸 드레스에는 스트랩 리스 등 체형과 용도에 맞게 그 다양함이 놀랍다.

브래지어를 보면 가슴이 막 봉긋해지기 시작하던 즈음이 떠오른다. 누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괜스레 수줍어했었다. 세상은 고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고른 건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지나치게 큰 여자는 옷태가 나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고, 가슴이 작은 여자는 여성미가 부족해 보일까 봐 안달이다. 멋을 부리고 싶고 섹슈얼해지고 싶은 여자들의 고민은 심심할 겨를이 없다.

적당히 솟아오른 여성의 가슴은 성적 매력을 발산한다. 결혼을 하고 십 년쯤 지난 어느 봄날에 남편이 슬며시 털어놓았다. 젊은 시절에 읽었던 소설 속에는, 어김없이 남자 주인공이 여자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는 장면이 나오던데 이게 어인 일이냐고 물었다. 빈약한 가슴임을 스스로도 아는지라 자존심이 상했으나 차분한 목소리로, 모든 것이 한갓 꿈이 아니겠느냐고 슬쩍 받아쳤다.

남편은 브래지어를 미워한다. 만년 중학생이라고 놀리면서도 습관처럼 나를 만진다. 어쩌다 브래지어를 두른 채 잠자리에 들면 가위로 냉큼 잘라버리고 싶다고 버럭 짜증을 부린다. 그러니 브래지어 선물은 언감생심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색깔로, 향으로 크기로 온갖 촉수를 곤두세워 자신을 드러낸다. 심지어 어떤 꽃은 눈요기가 될 만한 헛꽃으로 나비를 유혹하기도 한다. 사람들 또한 부지런히 자신을 치장하는 데 시간과 공을 들인다. 마음을 얻기 위해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매만지고 옷으로 멋을 부린다. 꾸미는 일에 유난하던 양품점 가게 여주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맨 처음 그녀를 보고 한참 눈을 뗄 수 없었다. 잡티 하나 없이 말갛고 탱탱한 피부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나하고 비슷한 또래라는데 도저히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하물며 육감적인 몸매는 여자가 보기에도 환상적이었다. 찬사와 더불어 관심을 보이자 자기가 관리 받는 병원을 소개해 주겠노라고 했다. 곧 저 여인처럼 되리라는 기대로 두근거렸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런 생각은 불식간에 자라목이 되었다. 피부 관리가 아니라 얼굴에다 무슨 실을 넣고 주사를 맞는다는 것이다. 들인 돈의 위력이 바닥 날 때쯤에 그녀 얼굴을 보면 놀랄 거라며, 어쩔 도리 없이 주기적으로 병원을 드나든다는 것이다.

그녀의 피부, 그녀의 가슴, 그녀의 늘씬한 각선미가 의술(醫術)과 돈으로 얻은 것이라니 실망과 환멸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녀의 씻을 수 없는 콤플렉스를 짚어보았다. 잠시 자신감이 생기면 무엇하랴. 껍데기는 멀쑥해 보일지 몰라도 속사정은 엉망진창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점점 탄력을 잃고 주름살이 터를 넓혀가는 자신을 받아들이기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럴지라도 내 몸의 주인은 엄연히 부모의 유전자를 지닌 나이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수억 대 일이라는 경쟁을 뚫고 선택된 귀한 몸일진대, 얼토당토않은 이물질에 자리를 허락하기가 영 내키질 않는다.

젖을 물려 자식들을 키운 몸은 어느덧 물기를 잃어간다. 예전의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소중한 존재임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련다. 진정 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귀담아 듣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볼 참이다. 그리고 계절에 순응하는 나무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련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려는가. 거기에 내가 걸어갈 미래가 펼쳐지지 않으랴. 겉모습이, 내 육신이 시들어간다고 안달하며 앙앙거릴 여유가 없다. 속가슴으로 긴장의 끈을 붙잡고, 손에는 내 생의 가을을 채색하기 위해 붓을 잡을 것이다.

예쁜 속옷이 입고 싶은 날, 나는 꽃분홍 브래지어를 두른다. 부드럽게 착 감겨드는 밀착감이 그저 그만이다. 브래지어의 가슴골 언저리에 보일 듯 말듯 수놓인 나비가 날아오른다. 주위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