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 / 김영식
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 펌프 안에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 합니다. 지상으로 나들이오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캄캄한 땅속으로 마중 나가는 물의 사신(使臣)이지요. 물이 귀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아주 작은 사물에도 인격을 부여한 옛 어른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입니다. “마중물‘하고 입안에 궁굴리면 먼 고향처럼 마음이 따뜻해져 옵니다.
마중물은 우선 기능으로서의 역할을 말함입니다. 마중물이 지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결코 올라오지 못합니다. 마치 데메테르가 지하로 내려가 사랑하는 딸 페르세포네를 구해오듯. 마중물이라는 계기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물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건 타자를 위한 자기 희생이지요.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요즘의 세태가 본받아야할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엔 마중물이 많습니다. 단풍은 겨울을 위한 마중물이고 구름은 비를 위한 마중물이며 현재는 내일을 휘한 마중물인 것입니다. 이렇듯 사물의 모든 현상 뒤에는 그 현상을 있게 한 마중물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 이전의 물, 물을 있게 하는 물, 시원(始原)으로서의 물. 이 세상에 근원이 없는 것들은 없습니다. 나무도 물고기도 하찮은 돌멩이 하나도 다 근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중물은 정체되어 있기를 거부하는 치열한 정신입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마그마는 흐르기를 멈춘 순간 바위로 굳어버리고 맙니다. 마중물은 스스로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움직임을 지향합니다. 멈추지 않는 운동성이야말로 마중물의 참속성인 것입니다. 그건 또 절차탁마하는 부단한 자기갱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한때 집안의 우물 유무가 부(富)의 정도를 가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고향집에도 펌프가 있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마을 공동 우물에 물동이를 갖다놓기 위해 대문을 나설 때마다 첨벙첨벙! 그 집의 물 긷는 소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마중물은 물의 씨앗입니다. 물의 종자인 것입니다. 이 물을 대지에 파종하면 대지는 더 큰 물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중물은 시작이며 도전이고 매래의 꿈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시간을 만나기 위해 홀연히 어둠의 골짜기로 내려가는 마중물. 저라고 왜 일말의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젖은 벽을 더듬고 앞으로 나아갈 때 죽음에 대한 공포로 되돌아서고 싶은 때는 또 없겠습니까? 그러나 마중물은 그 모든 고난을 인내하고 마침내 지하의 물과 조우하고 맙니다. 가슴에 도전과 꿈 한 바가지씩 가지고 있다면, 그걸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역경의 숲도 다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금 불화와 분쟁의 장소에 마중물 한 바가지를 놓아드리고 싶습니다. 그 마중물이 불신과 증오와 갈등으로 점철된 캄캄한 지하로 내려가 이해와 공존과 화해의 손을 잡고 지상으로 올라오길 기원해봅니다. 음지에서 양지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건너가게 하는 힘이 마중물 한 바가지에 있다는 걸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이 황폐해진 저도 오늘은 이 마중물로 꽃과 새와 별들을 길어 올려 시(詩)를 지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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