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번 마을버스 / 이복희
우리 집은 5층이다. 비교적 시야가 트여 있어 고만고만한 동네 주택들과 저만큼 월드컵 경기장의 하얀 지붕과 하늘공원 능선이 보인다. 저녁이면 고운 노을을 배경으로 강변도로에 드문드문 늘어선 가로등이 로드무비의 한 장면처럼 마음을 건드리곤 한다. 그중에서도 저만큼 비스듬히 내려다보이는 마을버스 종점이 유난히 시선을 끈다.버스 서너 대가 석축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치 초록색 길짐승들이 서로 몸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석축 위 간선도로에도 쉴 새 없이 차들이 달린다. 베란다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한 번씩 눈길이 가는 마을버스 종점.
종점에서 거리가 얼마 안 되는 우리 집 앞에서도 멈춘다. 자가용처럼 편리하다. 전철역에서 바로 타고 집 앞에 내리니 그렇게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이 든 것 같다. 이용하지 않을 때도 베란다 문을 열고 한참씩 바라본다. 그냥 보고 있으면 어떤 애환 같은 게 느껴져 이상하게 짠해진다.
멈춰 있다가도 출발 시간이 되면 이마에 반짝 초록색 불이 들어온다. '함께 서울'이라는 LED 조명 글씨가 흘림체로 환하다. 다음엔 '마포 16'이라는 글씨가 보이고 노선명이 번갈아 뜬다. 출발을 위해 시동을 걸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버스의 이마를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그렇게 기지개를 켜면 이제 달릴 채비가 되었다는 신호다.
어느 정류장에서든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태우기 위하여 시동을 건다. 무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충직하게 달려간다. 전철로 환승하기 위해, 또한 볼 일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길게 혹은 짧게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초록버스 이마에 달린 16이라는 번호를 보면 안도한다. 사소하면서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런 작은 약속들이 이어지며 사람들의 일상은 영위되는 게 아닐까. 마을버스는 서민들의 그런 일상을 지켜주고 있다.
동네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거의 2차선이다. 그 좁은 도로 양쪽에 붙박이처럼 서있는 수많은 차들, 나가는 마을버스는 들어오는 차를 위해 적당한 곳에서 양보를 해야 한다. 그 불법 주차된 차들은 버스 기사들이 수시로 무선 연락을 주고받으며 어디서 비켜서야 하는지 고심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 동네는 서민들이 많이 사는 편인데 자동차는 왜 그리 많은지. 버스에서 내다볼라치면 아슬아슬하다.
내가 탄 차가 빈 곳을 찾아 차 앞쪽 머리를 바짝 붙이고 멈춘다는 것은 반대쪽에서 다른 버스가 온다는 신호다. 모든 버스의 운행에 적용되는 묵계가 아닌가 싶다. 승객들도 어쩔 수 없이 그 기다림의 시간에 동참하게 된다. 사소한 그런 모습에서 나는 이상하게 감동을 받곤 한다.
교통의 흐름이 정체된 순간에도, 그렇게 양보하는 순간에도 운전기사의 표정은 그저 덤덤하다. 짜증도 내지 않는다. 더러 젊은 분들도 있지만 머리가 하얀 기사들도 많다. 어떤 차를 타면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 운전기사를 몰래 살펴보게 된다. 무슨 일을 하다가 퇴직하셨을까. 혼자 궁금해진다. 때로는 풋풋한 청년들이 머리도 노랗게 물들이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채 운전을 한다. 아마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같다.
그날따라 차안이 만원이었다. 언제나처럼 몸과 마음을 턱 맡기고 앉아 있는데 버스가 급정거를 했다. 불볕이 내리쬐는 한낮. 비명소리와 함께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일어났다. 서있던 사람들 거의 다 한꺼번에 도미노처럼 앞으로 쏠리며 포개지는 것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오토바이 한 대와 부딪힌 모양이었다. 마을버스는 빨리 달리지 않는다. 그런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다행히 앞쪽에 앉아있던 나는 잠깐 흔들렸을 뿐 안전했다. 얼른 늙수그레한 기사의 안색을 살폈다. 당황하지 않고 우선순위를 따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119 구급대원들이 오고 오토바이를 몰던 택배기사도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승객들도 의외로 다친 사람이 없는 듯 몇 대나 몰려온 구급차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나의 승객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고를 당한 마을버스와 그 기사가 마음에 쓰였다. 마치 내가 잘 아는 사람의 일인 것처럼. 어느새 마을버스는 내게 그런 의미가 되어 있다. 자주 편하게 이용하다 보니 공짜로 타는 것도 아닌데 고맙고 친밀한 것이다.
아침 출근 시간. 종점은 텅 비어 있다. 출근하는 승객들을 태우러 쉴 새도, 배차간격도 없이 다 나간 모양이다. 나는 언제 출근이라는 걸 했던가, 잠시 쓸쓸해서 울적해진다. 늦은 밤, 12시가 가까운데 버스 한 대가 이마에 불을 켜고 출발 중이다. 막차겠지.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태우러 나간다. 차가 끊어졌을까봐 조바심하고 있을 텐데, 공연히 내 마음이 놓인다. 얼어붙은 겨울, 이른 새벽에도 초록색 버스들은 어김없이 준비태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종종걸음으로 버스에 오르는 새벽 출근길조차 부럽다.
그렇게 들고 나는 버스들을 볼 때마다 삶의 애환이 결코 다른 데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의 삶과 각각의 사연과 형편을 싣고 하루를 제일 먼저 시작하고 밤늦게까지 돌아오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마을버스야말로 우리네 삶의 애환을 대변하지 않을까.
오늘도 초록색 길짐승 하나가 종점에서 잠시 졸고 있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하늘을 놓치다 / 왕린 (0) | 2021.05.09 |
---|---|
[좋은수필]주홍색 우산 / 김예경 (0) | 2021.05.08 |
[좋은수필]그녀는 너무 예뻤다 / 정재순 (0) | 2021.05.06 |
[좋은수필]내 안의 지도 / 김주남 (0) | 2021.05.05 |
[좋은수필]타버린 잔 / 안도현 (0) | 2021.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