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순이 / 정재순
세상에 모든 것에는 이름이 딸려 있다. 참하게 핀다고 진달래, 쓰디쓰다고 씀바귀, 상처를 내면 애기 똥처럼 노란 유액이 난다고 애기똥풀이다. 구석진 길모퉁이에 아무렇게 돋아난 작은 풀꽃도 이름을 가지면 하나의 의미가 된다.
끝순이는 내가 꼬맹이 때 이름이다. 형제들이 나를 놀려먹고 싶을 때면 끝순이라 불렀다. 어감부터 왠지 부끄러움을 일으켰다. 옥편을 찾아보고 뜻을 음미해봤는데, 성의도 없이 막 지은 것 같았다. 살아가는데 장애라도 되는 양 여겼다. 단 한 번도 툭 터놓고 말하지 않았으니 비밀이라 해도 될 성싶다.
호적에 올리는 이름과 불러주는 이름이 다른 아이가 꽤 있었다. 딸을 줄지어 낳은 경우 ‘딸 막이 이름’을 불러주면 후에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이름값을 톡톡히 했는지 남동생이 생겼다. 내리 딸만 여섯인 앞집 연옥이 엄마는 나란히 손잡고 다니는 우리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 집 딸들 이름은 하나같이 예뻤다. 일 년이 멀다하고 배가 불러오던 연옥이 엄마도 딸 막이 이름을 지었더라면 아들을 낳았을까.
끝순이는 형제 중에 이목구비가 유달리 자유분방한 아이였다. 가을걷이가 끝나자 뜨내기 방물장수가 이십여 가구 남짓 되는 마을을 찾아왔다. 우리 집 들마루에 앉은 보따리장수는 나를 두고 한 마디 툭 던졌다.
"나중에 보소, 복코에 바가지 상이라 잘 살 끼구먼.”
얼굴상이 바가지처럼 오목해서 복을 퍼 담는다나. 나직하긴 해도 코끝이 동그스름하고 콧방울에 살집이 도톰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지만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부끄러워서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은 내 어깨도 괜스레 힘이 들어갔다. 은근 그 말이 각인되어 식구들은 물론, 스스로도 나의 미래는 당연히 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지 않아 아버지 부임지를 따라서 도시로 왔다. 어린 내 눈에도 도시와 시골은 많이 달랐다. 들에 나가 뛰어놀거나 공기와 고무줄놀이를 하는 시골과 달리, 아이들이 문방구의 연탄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놀았다. 하얗고 네모난 사탕을 국자에 녹여서 먹고, 또 국자 속 설탕 알갱이가 갈색 액체로 변하면 소다를 넣어서 철판에다 납작하게 눌러 무늬를 찍었다. 옷핀에 침을 발라가며 달 모양, 별 모양이 부서지지 않게 살살 떼어내곤 했다.
골목길 모퉁이에 만화방이 있었다. 오밀조밀한 벽 진열장에 빼곡한 만화책과 길쭉한 나무의자 몇 개가 전부인 좁다란 공간이었다. 헌책 냄새로 가득한 거기 들어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인공 꺼벙이가 되고, 마음만 먹으면 금세 요술공주로 변할 수도 있어서 신명이 났다. 가족사가 애달픈 애꾸눈 무사가 긴 칼을 허리에 차고 방랑자처럼 떠도는 장면이 나오면 덩달아 내 마음도 무거웠다. 주인공이 웃으면 나도 웃고, 눈물을 흘리면 나도 따라 울었다.
아버지는 성정이 유별하셨으나 막내딸에겐 한없이 너그러우셨다. 학업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도, 잘못을 저질러도 언제나 내 편이었다. 마치 아버지 전생에 깊은 은혜를 입은 인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대했다.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당신이 있기에 애써 꾀를 내거나 행동을 재바르게 할 필요가 없었다.
결혼 이후에는 달리 불렸다. 남편 뒷바라지하던 신혼 때는 새댁으로 불렸다. 아이를 낳고 키울 때는 ㅇㅇ엄마였다. 호칭부터 누구의 부속물이었다. 본명은 주민증에나 있는 별명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 다 키운 다음에 나를 다시 찾기로 마음먹었다.
현실에 안주하던 내가 이제 다른 길을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나를 찾아가는 가슴이 설렌다. 번뜩 떠오르는 생각들을 밤낮없이 붙들고 늘어지는 바람에 문득문득 놀란다. 이런 근성은 지금껏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속절없이 아버지가 떠오른다. 무조건 믿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당신의 속심을 헤아려 본다.
이제 와 새삼, 내 이름 끝순이가 아련한 고향처럼 정겹다. 어릴 적엔 도무지 입에 맞지 않던 엄마 반찬이, 어느 날 갑자기 간절히 먹고 싶어지는 것처럼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이제 누구라도 '끝순아' 하고 부르면 스스럼없이 대답할 수 있겠다.
소싯적 이름의 효력은 사라졌지만 내 삶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 이름으로 살아온 나를 돌아보면 좋은 시절을 어영부영 세월만 보냈다. 몸을 던져 어디에 끈질기게 매달려 본 적이 없다. 이순을 바라보는 지금에야 소망이 생기고 하고자 하는 의욕도 살아난다. 글을 쓰고 글을 발표하면서 글머리에 내 이름 석 자를 올린다.
쏜살처럼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다. 이제 끝순이답게 제대로 달려볼까 한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끝내주게 살아보고 싶은 소망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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