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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은물 / 서해숙

은물 / 서해숙

 

 

 

아들방문을 지킨 지 세 시간째다. 녀석은 여명에 도착하여 밥을 한 술 뜨자마자 골아 떨어졌다. 방으로 들어가면서 불쑥 내 민 종이 한 장. 학생시절에도 잘 받아 오지 않던 상장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몇 년 새 아들은 집에만 오면 꼭 은물을 펼쳐 놓은 것같이 늘어지게 잔다. 객지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잠으로 말해 준다. 극성엄마 수료증 같은 그 상장을 바라보다가 심심해진 나는 장 한 켠에 쌓아둔 은물을 만지작거린다. 은물은 아들과 딸이 유아기에 갖고 놀던 장난감이다.

나무통에 잘 담겨진 은물은 정갈하나 손때가 묻어 있다. 궁핍하던 시절에 큰 맘 먹고 사들인 귀한 장난감이여서 특히 정이 들었다. 이사 때마다 갖고 다녔더니 이제 손주가 태어나면 대물림 할 놀이 감이 되겠다.

우리는 양가 모두 몰락한 집안의 셋째였다. 결혼을 할 무렵에는 도움은커녕 빚만 떠안고 신접살림을 차려야 했다. 제 때에 대학을 못 간 우리는 공부에 한이 맺혔다. 둘 다 만학으로 대학을 다니고 궁핍한 살림살이에도 남편은 대학원까지 마쳤다. 말단 은행원의 외벌이는 양가의 용돈송금과 아이들 유치원비와 더불어 남편 학비가 부담스러웠다.

육아에 대한 바람직한 모델이 없었기에 교구상의 말을 믿었다. 은물은 하느님이 유아에게 준 선물이라고 했다. 그 당시 남편의 두 달 치 월급을 웃도는 돈을 주고 마련했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 간 격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그 교구상이 고맙다. 일 때문에 아이들의 학업을 살펴야 했던 시절에는 정작 소홀했던 우리에게 아들과 딸은 은물을 오래 가지고 논 덕분인지 나름대로 자라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은물은 유치원창시자 프뢰벨이 만든 놀이감이다. 사물형태의 기본적인 조건인 점이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며, 면이 건축물이 되는 과정을 놀이를 통해 익히는 교구이다. 아이들의 심신발달과 요구에 맞추어 모양이 단순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발달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특히 털실로 만든 색색깔의 은물은 유모차에 매달고 다니기까지 했었다.

극성엄마였던 나는 육아서대로 아이를 기르기로 했었다. 아들이 36개월이 되자 인지능력이 급격히 발달하는 시기라고 은물교육을 시켰다. 교구를 들여 놓은 것도 목돈이 들어 부담스러웠지만, 그 교구로 놀아줄 교사를 부르는 게 경제적인 부담이 컷었다. 흉보면서 배운다고 어머니처럼 나도 억척같이 아이들에게 공을 들였다. 이집 저집 방문하는 교사는 여동생 같아서 늘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게 했었다.

레고와 함께 영유아에게는 최고의 창의성 교구라고 할 수 있은 은물은 훗날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운영할 때도 꼭 활용했다. 육아는 경험이라고 했다. 자꾸 진화하는 교구의 유혹이 있었지만 뿌리칠 수 있었던 건 직접 우리아이들이 체험을 한 덕분이었다. 전문 강사를 불러 수업을 시키고 나면 원장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한 것 같아 뿌듯했다.

1번 은물은 털실로 짜여 져서 꼬리가 긴 공이다. 촉감이 말랑말랑해서 영아들의 감각을 발달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꼬리를 말아도 풀어도 재밌는 놀이 감이 된다. 보행기 앞에 매달아 흔들면 흥미로운 모빌이 되기도 한다. 아이 앞에서 그네처럼 흔들며 노래를 불러주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까르르 웃곤 한다. 2번 은물은 난이도가 있는 원목기구다. 창의력을 계발시켜 줄 수 있다. 고사리 손으로 상자를 열고 닫는 것부터 가르쳐준다.

3.4번부터 제법 난이도가 있고 눈과 손의 협응력이 필요한 교구다. 공간의 개념을 익히기에는 4번과 5번 은물이 제격이다. 양손을 씀으로써 우뇌와 좌뇌를 골고루 발달시킬 수 있다.

색상을 익히고 형태 변별력을 익히며 패턴을 알게 하는 교구를 갖고 노는 모습을 보면 안 먹어도 배부른 부모 심정이 되곤 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은물을 갖고 노는 걸 익히는 데 1년은 족히 걸린다. 어려운 형편에 무슨 배짱으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간이 큰 주부였다. 묵묵히 협조해 준 남편에게 미안함이 인다.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도 잘 간수하고 있는 은물은 가끔씩 집안 청소를 하다가 내가 놀아도 참 재미있다. 아들이 처음 은물수업을 할 때는 사십분 교육시간에 화장실을 가고 물을 마시러 자주 들락거렸다. 기다려 주었다. 5살에 한 번 7살에 한 번 교사를 주 2회 불러서 그야말로 놀이 특별과외를 시켰다.

남녀 차별대우를 받았던 나의 성장기를 돌아보며 둘째인 딸에게도 은물을 시켰다. 딸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차근차근 수업을 받았다. 때때로 둘이서 거실 가득 은물을 펼쳐 놓고 놀다가 정리시간이 되면 아들이 선생님 흉내를 내면서 동생에게 시범을 보이곤 했다. 딸은 고개를 주억이며 오빠의 조언을 잘 받아들였다.

패션 감각이 남다르게 발달한 딸아이는 촌티를 못 벗는 엄마를 요리조리 꾸며주며 멋 내기를 가르쳐 준다. 은물로 익힌 패턴 감각이 딸아이에겐 있는 것일까? 유난히 눈썰미가 있다. 이순인 내가 젊은이들과의 대화에 어설프지 않게 합류할 수 있는 건 딸의 도움 덕이다. 영화관 나들이도 같이 가고 여행지 안내도 해준다. 몇 개국 외국어에도 능통한 딸은 여행지에서 내 보호자가 된다.

남편이 규칙적인 경제활동을 곧 끝내야 한다. 아들은 축하인지 격려인지, 꽤 큰돈을 보내왔다. 딸도 지난 명절에 제법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이제 아이들이 우리에게 은물수업료를 댈 모양이다.

요즘 우리부부는 1번 은물놀이 같은 운동을 한다. 연습장과 집을 건드려 놓은 모빌처럼 오가지만 즐겁다. 은물 놀이처럼 이웃과 친구를 엮어 할머니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차를 마시며 말벗을 해 드린다. 잘 늙어가는 놀이를 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의 장속에서 은물을 만났다. 반가움에 열어보니 제법 손때가 묻어있다. 식사수발을 끝내고 어머니와 마주 앉아 은물놀이를 해 본다. 5번 은물 쌓기 놀이에서 세모와 세모를 붙이면 큰 네모가 되는 과정을 떨리는 손으로 완성하신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이제 내게는 크나 큰 건축물이던 어머니가 면이 되고, 선이 되고, 점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어 돌아오는 발걸음이 천근이었다. 다시 아가가 된 어머니의 최고 놀이감도 은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