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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저 공중의 새를 당신이 기르신다고요? / 김종완

저 공중의 새를 당신이 기르신다고요? / 김종완

 

 

 

불교에서 궁극을 해탈에 둔다는 것은 생의 궁극을 완성에 둔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선()을 탁월함에 두었다는 것 또한 생의 궁극을 완성에 두었다는 말이다. 참으로 이해가 간다. 이 지루한 세상을 살기 위해선 지루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끝없이 몰두할 수 있는 과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과제라면 완성만한 게 있을까.

롤랑 바르트(1915~1980)225일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한 달 후인 326일 죽음을 맞이했다. 의사들은 그가 죽을 만큼의 사고를 당한 게 결코 아니었다고 했다. 회복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그는 사고를 핑계 삼아 스스로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 시대를 풍미한 훌륭한 사상가가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이만큼 완성되었으면 이번 생은 됐다고 생각한 걸까. 완성의 의욕을 포기하자 갑자기 생이 지루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지루함을 견디는 힘을 기르지 못했나보다. 그런 면에서 동양의 선사가 서양의 철학가보다 낫다. 난 면벽수도해서 깨달으면 이 세상과는 다른 엄청난 세상이 펼쳐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득도했다는 선사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아무래도 그게 아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외치고 외쳤다.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할수록 더 신비스러워할 뿐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게 정말 사실이라면? ()란 말 그대로 앞마당의 잣나무(庭前柏樹子)라면? 일상의 지루함을 차이의 변화무쌍함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도다. 늙은 선사가 햇볕 좋은 뜨락에서 어린 동자와 천진하게 놀았다는 이야기들은 도가 일상임을 보여주는 산 증거이기도 하다.

해월의 수도 이야기다. 동학의 공부라는 게 참 간단하다. 한울님을 직접 만나면 되는 것이다. 난 그 깔끔함이 좋다. 스승 수운 선생이 한울님의 소리를 직접 들은 것처럼 그도 한울님의 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다. 그때가 한겨울이었고, 수운은 경주 관하의 감시가 조여 오자 남원으로 피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스승을 보고 싶고, 아무리 정좌하고 기도를 해도 한울님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답답해서 앞개울의 얼음을 깨고 풍덩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때 소리가 들렸다.

찬 샘물에 급히 들면 몸에 해롭느리라(陽身所害又寒泉之急座)).”

어찌 이게 하늘의 소리이겠는가. 하늘의 소리가 이렇게도 시시할 수가 있단 말인가? 분명 들었는데 하늘의 소리일 리는 없고. 그리고 몇 개월 후, 남원으로 피신 갔던 스승을 경주에서 다시 만나자 스승이 물었다.

그렇게 듣고자 했던 한울님의 소리를 들었느냐?”

여차여차 했는데 한울님의 소리일 리는 없고, 하면서 그간의 경위를 보고했다. 그러자 수운이 되물었다.

그때가 언제였느냐?”

해월은 모월모일모시였노라고 정확히 대답했다. 수운이 곱새겨보니 그때는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밤기도식을 올릴 때였다. 그때 수운도 양신소해 우한천지급좌(陽身所害 又寒泉之急坐)”라는 새삼스러운 강화()' 를 받고 이상하게 여기며 기도식을 마친 뒤 종이에 적고 큰 소리로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수덕문의 글 가운데 싣게 되었다. 수운은 쾌상 위에서 수덕문을 꺼내 보여주며 말씀하셨다.

영우(靈友)가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나도 들었소. 나는 그 글을 써서 큰 목소리로 외운 적이 있었소. 우리가 같은 때 같은 한울님 말씀을 들은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같았음을 뜻하니 기쁜 일이오. 앞으로 한울님을 위해 포덕하시오.”

 

도올은 강의에서 내가 소리쳐 읽었는데 네가 그 소리를 들은 것이로구나라고 해석했다. 반면에 정통 천도교도인 정경홍의 해석은 같은 때 한울님의 말씀을 동시에 들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후자를 받아드렸다. 최해월 선생은 그때 득도를 했다. 한울님의 말씀이 바로 인간의 말이라는 사실에서 득도했다. 그는 득도를 했고 나는 다만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충격 없이 하나의 정보나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득도란 정녕 어렵다. 아주 평범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는 신비. 그건 새로 우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동양의 선(), 먹고 자고 싸고, 끝없는 반복의 일상(日常)’차이의 일상으로 읽어내는 힘이다. 차이란 다른 생각이 한번 들었다가 아니라 몸 전체로, 골수 끝까지 체질화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게 깨달음이다. 생각 한번이야 흉내낼 수 있겠지만 몸 전체로, 골수 끝까지 변한다는 건 존재의 변혁이다. 최진석은 그걸 곤이 붕이 되는 변혁이라 했다. 이건 우주가 또 한 번 개벽하는 어려움이다. 나야 당연히 포기했지만 요즘 어이없는 실수로 얻은 것이 하나 있다.

 

작년 가을 무렵 사기를 당해 큰돈을 떼였다. 올 연말쯤 에세이스트사()도 셋방살이를 면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다가, 그 꿈이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이젠 내가 활동하는 동안에 에세이스트 사무실을 내 힘으로 장만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충격은 컸다. 당장 운영자금에 허덕였고, 이 국면을 대강 수습하는 데 아마 3년은 족히 걸릴 거였다. 돈이야 항상 허덕였기에 그런다 치더라도 나의 어리석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사태는 이미 벌어졌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태연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몸이 아팠다. 지병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당뇨수치가 요동을 쳤고, 빈혈이 심해졌고, 심장이 제 기능을 못하여 숨이 막히곤 했다. 그리고 설사병이 시작됐다. 깊은 밤, 잠자리에 누울 때면 이렇게 잠이 든 다음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눈을 뜨지 않아도 그만일 것 같았다. 그런 유혹이 잠자리로 스멀스멀 자주 기어들었다. 그러다 정말 죽기라도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있는 사람에겐 푼돈도 못되는 알량한 몇 푼에 명색이 선비가 되겠다는 놈이 보트라져 말라서 타버리다의 전라도 방언 밤새 죽었다고 혀를 찰 것이니 이 창피를 어이할꼬! 알량한 자존심이 유혹을 떨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이 무서워졌다. 공포에 벌벌 떨던 어느 날 나에게 들리는 소리.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태 6/26). 큰 위로가 되었다. 사실 난 지금까지 이 성구를 비웃었다. 한겨울이면 많은 새들이 굶어죽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새들도 죽어라고먹이 활동을 해서 살지, 먹을 게 지천이어서 거저 사는 게 아닌데, 당신께서 죽어라고를 기르시는 것이라고 하면 아무리 하느님이라 해도 좀 염치가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 이 구절이 천둥벼락치듯 새롭게 들려왔다. 그동안은 앞 구절에 매여 뒤 부분을 간과했던 것이다. 이번에 나를 후려친 것은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였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겁먹지 마라, 겁먹어봐야 아무 쓸데없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그냥 당당히 살아라, 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당당히 견디며 사는 거다. 신은 기르지 않음(無爲)으로 기르셨다(). 신은 한없이 자비로워서 사람이 그리는대로 존재하신다.

그러자 한 생각이 떠올랐다. 14년 전 스스로 가난하게 살겠다고 출가하듯 서울로 올라왔었다. 지루한 안주로부터, 안정으로부터의 탈주였다. 내 스스로 헐벗은 채 허허벌판에 서버린 것. 용케 14년을 버텼다. 그거면 됐지, 버리고 온 그 속으로 이제 새삼스레 다시 기어들어가려는 건 또 뭔가. 이왕 깨진 거,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애석해하지 말자. 문학은 정신으로도 집을 지어선 안 된다. 기둥을 세우고 벽을 막고 문을 달으면 그 벽과 문이 세상의 바람과 소리와 흐름을 막을 것이다. 벽 없는 집, 문 없는 집이 문학이고 예술이다. 그리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담론의 장 소통의 장을 열어보려는 꿈을 꾸는 자들이 작가다. 그런데 하물며 도시의 콘크리트 구조물 댓 평을 가져볼 꿈에 매몰되어 낑낑거리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운수행각이라 했다. 깨진 게 다행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얼마 되지 않는 돈, 세고 또 세느라고 날을 샐 뻔했구나.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지 말자. 오늘에만 충실하자. 그러면 길은 또 길로 이어지리니!

세상이 다시 보였다.

서울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우리 사무실에서 보는 인왕산 하늘이다. 청와대 주인들이 답답한 것이 싫으셨던지 특히나 청와대 서쪽 하늘을 비워 놓았다. 서울 사람 중에 저 아름다운 하늘을 보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덕분에 난 오늘도 이렇게 배가 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