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 조경숙
신천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청둥오리와 고방오리는 오늘도 자맥질이 한창이고 사람들은 모자와 털장갑으로 중무장하고 바람을 가르고 있다.
봄은 아직 멀리 있는 것 같은데 수양버들에 참새 혀 같은 순들이 돋았다. 추위를 어떻게 견디려고 하마 껍질을 벗고 나왔는가. 뿌리에서 빨아들인 수액을 가지 끝으로 나르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연둣빛이 설핏 보이는 줄기 아래 서서 신접살림 준비로 바쁜 까치 한 쌍을 올려다본다. 문득 내가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속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마흔아홉 살 때였다. 친정어머니가 아홉수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흔아홉 고갯마루는 얼마나 험한지 가래톳이 돋았다. 잔병치레 한번 없던 나는 사흘이 멀다 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몇 번은 죽을 만큼 아파 응급실 신세도 졌다. 몇 달 소화가 안 된다던 친구가 위암으로 먼 길을 떠난 그 날도 약 기운에 취해 까무룩 잠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때가 새벽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었다. 어둑어둑한 방안을 둘러보다 벽에 걸린 <마상청앵도> 영인본에 눈길이 멈추었다. 나귀를 탄 선비가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비의 시선을 따라가니 노란 꾀꼬리 한 쌍이 보였다. 눈처럼 흰 두루마기를 입고 한 손에는 쥘부채를 든 자태가 등청하는 길은 아니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말구종을 앞세워 어딜 행차하는 길일까. 바쁠 것 없이 느릿느릿 나귀를 타고 가다 꾀꼬리 노랫소리에 멈춰서 고개를 돌린 그 모습이 눈부셨다.
언제쯤이면 나도 저런 여유를 누릴 수 있을까. 몸이 일어나고 싶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자명종 소리가 나를 일으켰다. 시간에 떠밀려 허겁지겁 하루를 보내고 자정이 가까워 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이면 또다시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야 했다.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내가 걸어온 길에도 연둣빛 싹이 돋고 꾀꼬리 한 쌍이 서로 희롱하고 있었을 텐데 기억에 없다. 젊었을 때는 생업에 바쁘고 흥미를 끄는 게 많아 자연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구차한 변명이다. 바늘 하나 꽂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이 아닐까.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는 나이라는 학창시절로 필름을 돌려보았다. 고개를 저었다. 언제 여유를 잃어버렸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내가 보였다.
자유경쟁 사회에서 나태라는 것은 추락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남보다 더 잘 살아야지, 뒤지지 않아야지 하는 강박감에 나를 전투 자세로 만들었다. 힘들게 일하는 것도 사랑했다. 강인한 의지력과 점점 더해가는 피로감 사이의 갈등도 즐겼다.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그 친구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겨울을 이겨내면 봄이 오리라 참고 기다렸건만 마흔아홉 고갯마루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이런 노랫말을 비웃었는데 병을 얻어 눕게 되니 모든 게 후회된다던 친구의 말이 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월든 호숫가에 살았던 소로우는 계절의 변화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충분하다고 했다. 몸이 따라주지 않기도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아닌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었다. 한 친구는 후회할 거라고 펄쩍 뛰었고 또 다른 친구는 어리석은 짓이고 배부른 소리라고 야단이었다. 마상청앵도 속 선비의 차림새를 잘 봐. 그림 볼 줄 몰라도 모두 갖춘 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갖춘 후에 여유가 있는 것이야. 백세시대라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무슨 수로 살아갈 거냐. 걱정 소리가 온종일 귀를 어지럽혔다. 마음속에는 폭풍우처럼 거친 갈등이 벌어졌지만,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 보다 오늘을 즐기며 사는 것도 소중하다 결론을 내렸다.
나는 달리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천천히 가던 길을 멈추어도 뭣할 텐데 달리던 말의 고삐를 잡아 세웠으니 요동은 생각보다 컸다. 어쩌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성공한 삶인 양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나와는 너무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동창 이야기를 들을 때는 우상으로 보인 <마상청앵도>의 선비가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수려한 외모와 도량 넓고 성격이 활달하여 신선과 같다던 단원을 그려 보았다.
하늘이 푸르다. 아침 산책길 숲에서 꽃향기, 나무 내음으로 목욕하고 새 소리로 마음을 맑히니 이런 행복이 어디 있으랴. 노을 진 삶에서 지나온 날을 돌아볼 때 나의 황금빛 봄날은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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