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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추억도 추억 나름 / 김상영

 

추억도 추억 나름 / 김상영

 

 

 

하늘은 맑았다. 오늘은 고향 장날이다.

열두 시에 만납시다. 브라보 콘~, 맛있는 감자탕 집에서.”

아침밥 상머리에서 흘러간 광고 노래로 흥을 돋웠다. 마누라가, 좋구나! 싶었는지 숟가락을 탁 부딪쳐왔다. 안개 낀 아침나절에 마누라는 읍내로 목욕가고, 나는 천년고찰 오가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타는 장돌뱅이 버스다. 제 딴엔 늙었는지 젊어 뵈는 운전기사가 틀어 놓은 흘러간 전자음악에 그야말로 옛날식 버스에 올라 차창 밖 텅 빈 들판을 멍하니 보고 앉았다.

야야!”

윗동네로 시집간 초등학교 동창생 자야가 날 툭 치며 반가워하는 외침이다. 아들 둘에 신랑은 마늘 장사에 반 농사꾼, 취직 못 한 서른 살 큰아들이 훤칠하다.

찬 바람 불면 동창끼리 밥이나 한 번 무야 안 되겠나. 그래, 누 누 있노?”

보자, 우식이, 진식이, 달박골 달호, 그 담엔 또 없나?”

객지살이 삼십 수년 만에 만나진 우연에 들뜬 나는 단숨에 질문과 답변을 쏟아놓았다. 구성진 뽕짝을 무시하며 목청을 돋우는 나를 못마땅한 듯 넘겨보는 백미러 속 운전기사의 껄끄러운 눈치에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말끝에 자야가 줄줄이 엮었다.

보자 늠이, 가아는 저거 신랑이 교장으로 있다가 퇴직해서 읍에 살고, 금옥이도 읍에 살고, 점자는 안계 살고, 종석이는 우체국장이고, 말짜 가아 신랑은 교통사고로 그만 주것뿔고.”

세월의 거친 흔적을 화장 빨로 애써 감춘 자야의 표정이 어둡다.

야야! 인생은 양파다 아이가. 한 꺼풀씩 벗겨보면 구구절절 사연 없는 집 있드나.“

난들 인생에 대해서 뭘 아나, 객쩍은 설레발로도 깔아진 분위기는 무겁기만 하였다.

아부지 머 하시노?” 뜬금없이 던지는 내 질문에 긴장한 아들 녀석의 대답이 엔진 소음에 묻혔다.

마늘 장사하시는데요.”

깡팬데요.”란 영화 속 대화를 기대한 건 애당초에 잘못된 것이었다. 아무도 이 썰렁한 유머를 알아주지 않았다. 이날 이때까지 나는 안되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냥 이대로 헤어지기엔 거시기한 분위기다. 신랑도 없지, 배도 출출하지, 더구나 오늘은 장날이 아니던가. 닭똥집 굴려 가며 생맥 한 잔을 기울이더라도 못다 한 이야기는 마저 하고 싶었다. 아쉬운 잠깐 사이, 흘러가는 정류장 인파 속에 눈치 없는 아들은 장승처럼 버티고 섰다. 해도 해도 안 되는 날 그날이 오늘이요, 오기로 밀어붙이기엔 우린 이미 늙었다.

! 마누라다. 아이구야 조심하길 잘했네. 집 나가 아득한 정신을 불러 퍼뜩 자세를 갖췄다. 목욕탕을 나와 헌 신랑을 기다리다 못해 휴대폰을 누르고 있는 그 자그마한 등 뒤에 살금살금 다가섰다. ‘내 사랑 거시기화면 가득히 흘러가는 그림 같은 자막, ~ 이 여자가 내 마누라구나.

까악!” “깜짝이야!”

뜻하지 아니한 장면에서 우리는 부부란 실감에 묘한 감동을 맛본다. 읍내에 하나뿐인 24시 감자탕 체인점에 마주 앉았다. 때 빼고 광낸 마누라 얼굴이 아직은 쓸 만하다.

얼굴이 꺼칠하다. 스킨은 발랐느냐, 받쳐 입은 셔츠 색깔이 칙칙하네. 사 놓은 옷 갖춰 입을 줄도 모른다느니 늘어놓는 잔소리가 싫지만은 않다. 있을 때 잘하라고 자옥이 신랑도 목 놓아 노래하질 않던가.

감자탕이 별달라 감자탕이냐. 감자 뼈가 있어 감자탕이라던데. 이 집엔 감자도 들었네. 반병 소주를 비우고 나니 기분이 그럴듯하다.

보소, 아침에 얘기한 대로 재를 걸어 넘어 볼까나?”

하모.”

적잖은 타향살이에 말씨가 짬뽕이다. 마누라지만 고즈넉한 재를 오랜만에 여자랑 걸어 넘는 분위기가 그럴듯하다.

당신, 아네모네가 뭔지 아나?”

아네모네는 피는데 아네모넨 지는데 아련히 떠오르는 ~”

왕복 삼십 리 재를 걸어 넘어 통학하던 그때 그 배고픈 시절, 대추나무에 걸린 동네 쇠불알 확성기는 애달픈 이미자의 노래를 끊임없이 틀어댔다. 누구나 노래에 얽힌 추억은 있기 마련이다. 라디오방송에 수없이 엽서를 날리던 그때를 함께 회상하였지만, 아네모네에 대한 내 감정은 온전히 공유할 수 없었다.

그 오르막 지루한 길에 입 다물고 타박 걸음을 계속할 순 없는 터, 뭔가를 얘기해야만 했다. 일찌감치 시집가서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던 여자 동창 하며, ‘부베의 연인그 애절한 이탈리아 영화음악이 귀에 익던 그 시절, 훤칠한 남자와 손잡고 마을을 지나던 교장 선생님의 그 예쁜 따님이 부러웠던 추억, 그 여자들 얘기에 나 자신이 취하였던가. 급기야 마누라 친구로서 세파에 시달려 니나노 집을 하고 사는 그녀에게 차인 아픈 기억까지를 떠벌리고야 말았다.

으잉, 뭣이라?” 아차차! 밥알이 곤두섰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빙시이 아이가!”

흥미롭게 듣고 있던 마누라가 뱉은 빈정거림이다. 젊은 날의 성질머리는 아닐지라도 받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매일반인 모양이다. 연애하려면 야무지게 하지, 그런 하찮은 친구에게 차이긴 왜 차이냐는 뜻이기도 할 게다. 남자 여럿 찬 전력의 마누라이긴 하다. 산 너머 동네라 그 살아온 이력도 알 만큼 알고 있는 터에 속으로는 전들 뭐 그리 잘 났냐는 생각에 대꾸하려다 삼켰다. 어설픈 언변에 뒷감당도 못 할 건 뻔한 노릇이다. 밥 잘 먹고 술 잘 마시고 내 돈 쓰고 이게 무슨 꼴인가.

그래, 일진이 사나운 날이 있다고들 하였지. 오늘이 그날이렷다. 나보다는 더 진한 사연을 숨긴 듯하건만 한결같은 묵비권으로 한세월을 까딱없이 살아내고 있는 내 마누라. ! 남은 세월엔 그녀들에게 차인 풋사랑 추억 나부랭이는 입 밖에도 내지 않을 것을 또다시 다짐하였다. 하지만 작심삼일 나 자신 나도 몰라. 허접한 소주 반병으로 무장해제 되는 요 가벼운 주둥아리를 어쩌란 말이냐.

입 닫고 산다 하여 첫사랑 옛 추억이 지워질 리는 없다. 행복에 겨워 겨워 추억에 목마른 어느 날, 니나노 집 그녀의 장단에 맞춰 못다 한 사랑가를 목메어 불러봄직도 하지 않겠는가. 남자의 순정을 복날 개 취급하는 세월이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