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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생명기운을 끊다 / 김상립

생명기운을 끊다 / 김상립 

 

 

아파트 베란다를 청소하다 보니 타일바닥과 벽면 틈 사이에서 보이지 않던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다. 무심코 보아 넘기면 존재자체를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작고 가녀린 풀이다. 어떻게 이런 좁은 틈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 작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신통한 일이다. 손 끝으로 가만히 쓸어본다. 부드러운 느낌보다는 강인하다는 느낌이 온다. 또 입으로 후 불어보지만 꼼짝도 않는다.

오래 전, 내가 공장을 운영하던 때의 일이다. 처음 일을 시작할 적에는 공장마당을 맨땅으로 남겨두고, 흙을 밟는 즐거움을 은근히 누렸다. 그런데 원료를 실어 나르는 대형 화물차들이 어찌나 흙먼지를 날려대는지 고객들은 물론이요, 직원들까지 불만을 제기하는 바람에 도저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어 마당 전부를 철근 시멘트로 두텁게 덮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흙먼지는 나지 않게 되었지만,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았다. 공장을 빙 둘러 싼 언덕에 풀과 나무가 무성했었는데, 하루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높고 단단한 시멘트 옹벽을 방패막이로 삼은 공장은 황량한 느낌마저 주었다.

졸지에 땅도, 나무도, 꽃이나 새소리마저 잃었다. 한 여름 이글이글 타는 태양 아래서 계절을 불살라 버리려는 듯 숨가쁘게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사라졌고, 곡식 부스러기를 입에 물고 길게 늘어섰던 개미떼도 간 곳이 없다. 싱싱한 풀과 나뭇잎을 스쳐온 바람은 더위에 지친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었는데, 그마저 열풍으로 변하고 말았다. 땅을 못 밟으면 마음의 여유마저 줄어들게 될 줄이야 어찌 내가 알았으랴! 궁여지책으로 시멘트 바닥 위에 붉은 벽돌로 나지막한 단을 쌓아 그 안에 흙을 붇고는, 몇 종류의 꽃과 키 낮은 정원수를 심어 보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모두 죽어버렸다. 실망한 나는 비교적 명줄이 질기다는 나무를 골라 다시 심었지만, 해를 넘기지 못하고 또 시들해져 갔다. 나날이 병약해지는 그것들이 보기 싫어 몇 군데나 되는 화단을 죄다 뜯어내 버리니, 마당은 도로 시멘트 세상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이 제 편하자고 손 쉽게 사용하게 된 시멘트가 식물에게는 이처럼 무서운 적이었다. 그런 어느 날, 두텁게 내려 부은 시멘트 가장자리로 풀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단 그 곳 만이 아니었다. 시멘트를 이어 붙인 자리나 깨어져 실금이 난 자리에도 이름 모를 작은 풀들이 세상 밖으로 열심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흙 기운이 비치는 틈새만 있으면, 어김없이 풀은 자라 갖가지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 내가 잘 못 판단했구나. 공장의 편의성만 생각했지 진정 땅을 몰랐구나, 적어도 마당 곳곳에 땅의 숨구멍이라도 만들어 두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나는 생명의 입김이 쉬지 않고 솟아 오르는 현장에 서서 많은 생각을 했다. 비록 사람이 땅에게 못할 짓을 했더라도, 긴 세월이 지나고 나면 땅은 자연적으로 되살아난다. 아마 생명기운이란 게 외부에서 무조건 누른다 해서 맥없이 소멸되는 게 아닌가 보다. 제게 맞는 기회가 찾아 올 때까지 꿋꿋하게 참고 견디며 힘을 비축하는 능력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베란다의 작은 풀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온 흙먼지가 쌓인 틈새를 고향으로 믿고 뿌리를 내린 것일 터이다. 인디언들은 땅을 가리켜 거리낌 없이 어머니라 부른다. 그래, 맞다. 어머니는 생명의 시작이며 사랑의 원천이 아니든가. 흙의 기운이 있으면 어디든 생명은 자라난다. 생명기운! 참으로 신비한 존재이다. 지구 자체를 생명으로 보는 견해도 결국 지구의 생명력 때문일 터이다. 이처럼 생명기운은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주위를 둘러쌓고 끊임없이 운행되고 있다. 생명기운의 본체인 광활한 우주는 우리 인간에게 순조로운 생명흐름에 충실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이런 희망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어 간다. 많은 인간들은 밉살스럽게도 생명의 흐름을 마구잡이로 끊어버리는 행위만 찾아서 일으키고 있다.

어느 누구라도 제가 함부로 해도 괜찮을 생명은 이 지구상에 단 하나도 없을 터인데 이를 지키지 않는다. 제가 남보다 더 가졌거나 조금이라도 힘이 세면 갑 질을 해가며 인생을 즐기려 한다. 이들에게 갑 질을 못하게 하면 당장 큰일이라도 일어날것처럼 안달을 하니 이것 정말 야단이다. 그런 까닭으로 자연도 파괴되고 많은 동물들이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아마존 숲은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값비싼 털이나 뿔을 가졌거나 약 성분을 몸 안에 지닌 동물들도 점차 멸종의 길을 가고 있다. 이처럼 생명흐름을 끊어버리는 중심에는 늘 인간이 버티고 있다. 국가간의 일도 마찬가지다. 생명원리로 따지자면 개인이나 국가나 꼭 마찬가지 일 터인데, 각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 중에는 국익을 핑계 삼아 틈만 보이면 힘을 과시하고 약한 나라를 핍박하기가 예사다. 또 가진 권력을 좋게 쓰지 못하고 독재를 부려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요런 틈바구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숨은 그대로 파리목숨이다. 생명기운이 철저히 짓밟히는 현장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지도자가 무리하게 잘못 가고 억압을 계속하면, 민중들이 들고일어나 혁명을 일으킨다. 식물도 짐승들도, 심지어는 세균이나 바이러스까지도 더 무서운 종으로 진화하여 사람에게 맞서려 하게 된다. 생명흐름을 억압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게 진화의 역사다. 물론 하늘의 기운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참고 참아가며 인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을 것으로 믿지만, 계속 이러다가는 자칫 사람의 존재가 귀하기는커녕 없애버려야 할 대상으로 판단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지구 곳곳에서는 자주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폭발하고, 해일도 일어난다. 극 지방의 만년설은 시간을 다투며 녹아 내리고, 거대 산불도 종종 발생하여 우리네 삶을 위협한다. 하늘이 인류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자꾸 보내는 것 같아 두렵기만 하다. 생명기운을 바로 알고, 쓰는 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인데, 그걸 모른다. 아니지 모른 척 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