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 염귀순
간만에 살맛이 난다. 올여름 내내 문 앞에서 대기 상태였어도 무관심이던 주인이 요즈음 외출 때마다 나를 찾는다. 여름과 가을이 몸을 섞는 애매한 시점에 계절과 상관없이 두루 신을 수 있는 나의 실용성 때문인지, 여하튼 그 날렵한 뾰족 굽의 ‘샌들’을 제쳐놓았다.
나를 팍 기죽게 했던 구두는 화려한 큐빅 장식에다 황금색 줄로 발등을 살짝 감는 세련미가 눈부셨다. 무엇보다 발뒤꿈치를 아슬아슬하게 받쳐 올린 맵시는 여자들의 각선미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녀석에 비해 별 예쁜 구석도 없이 그냥 검정 납작 구두인 나를, 주인은 “발이 너무 편하다.”고 치켜세우며 데려왔었다. 그래놓곤 딱 한번 야외 나들이에 동행한 후로 숫제 모른 척하는 통에 내 속이 답답해 터지는 줄 알았다. 이게 무슨 경우냐고 투덜댈 적엔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고 집작이나 했으리. 기다리면 때가 온다더니 이제야 실감한다.
주인의 외출 길을 책임지는 신발은 언제나 뒤꿈치를 바짝 세운 ‘하이힐’ 부류였다. 여차하면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경쟁 사회에서 암만해도 주눅이 드는 판에, 늘씬하게 키라도 올려주겠다면 반가운 유혹일 터. 하이힐의 외모적 상승효과는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주인의 신발장에도 당연히 뾰족구두 일색이다. 굽이 낮은 신발은 발바닥이 아프다거나 뒤로 넘어갈 것 같다며 평소 하이힐을 편애하던 주인이라, 몇 켤레의 납작 구두와 운동화는 맨 아래 칸에서 숨 죽인 처지다. 위 칸에 모셔진 하이힐 녀석들이 빈번하게 외출을 하며 지체 놓은 신분인 양 등등하던 기세라니. 지금 기분으론 나도 당당하게 한마디 던지고 싶다.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이 있더냐고. 여태 세상일을 그리 모를 수 있냐고.
기실 삶에 장답이 있던가 말이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렇고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바닥이 세상 전부인 신발의 생존 방식이란 무거운 존재를 지극정성 떠받드는 것. 하중을 견디며 낮고 추루한 곳을 몸 닳도록 걷는 일이다. 곳곳에 도사린 음험한 함정과 불쑥불쑥 불거진 돌기, 이리저리 꺾이는 굴곡과 암담한 가풀막에도 핏대를 세우거나 항변할 길을 없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지만 겸허히 포복한다. 살아있음에 집중하지 않으면 어느 구석으로 나뒹굴지도 모른다. 삶의 한순간 갑작스런 종지부를 찍는다 해도 걷는 동안만큼은 ‘오늘이 새날’이라며 하루를 힘껏 밀고 나간다.
떠받치며 걷는 일이 천직이지만 제바람에 팔팔 신명도 낸다. 고된 여정에도 미지의 길은 설렘과 호기심을 담고 있으며 가슴 벅찬 감동이라니까. 그동안 주인과 잦은 동행에 우쭐대던 ‘하이힐’녀석들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게다. 어쩜 주인과 더불어 걷던 길을 내려놓은 뒤에야 비로소 발원하는 슬픔을 감지하고 소스라칠지도 모른다. 낯설고 서툴고 아득한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끝나버리는, 그것이 길 위의 삶이다.
들여다보면 땀도 눈물도 배지 않는 삶이 어디 있을까 싶다. 어떤 생이든 수고와 통증이 들어 있고 비애와 감격과 환희가 버무려진다. 복잡하고 다난한 길도 가노라면 어렴풋이 가닥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또 서툴고 다시 낯설게 다가오는 삶은 애초 ‘단 한 번의 초행길’이다. 길고도 짧은 생의 깊이를 어찌 쉽사리 알랴. 한데 정밀이지 듣기 거북한 소리가 있다. 종종 수다쟁이 여자들끼리 모이면 애먼 우리를 우스개로 들먹인다. “너무 헌신하다가는 헌신짝 된다.”
물론 우리가 듣고 있거나 말거나이다. 자의식이 강해서이건 자기애가 넘쳐서건, 서슴없이 말하는 것으로 봐서 어쨌든 옛날보다 똑똑한 여자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낮은 곳에서 헌신하다 헌 신으로 들아 가는 것이 묵인된 우리들의 숙명이거늘, 대놓고 그런 말까지 하냐고. 비록 세상을 눈 아래로 보는 사람들일망정 우리들 신발이 없으면 거칠고 질척거리는 길을 마음대로 나설 수 없다는 건 자명한 현실. 자신의 몸을 의탁하는 입장에선 배은망덕이요 무례함의 극치다. 사람들은 망각하나 보다. 그렇게 약은 자들의 삶도 언젠가는 홀연한 구두 한 켤레로 남는다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산다.
신발은 고단한 노동 막간에 찾아오는 잠깐의 휴식에서라도 나란히 놓여 질 때 위로가 된다. 최소한이나마 대우를 받는 기분이다. 간당간당 끌고 오던 길에서 전해들은 길바닥의 말과 바람의 말들을 옆 지기와 주고받으면서 헐떡여왔던 노고를 서로 위무하며 상처를 다독거린다. 긴장감으로 기우뚱대던 심신을 풀어놓은 후 다음을 밀고 나갈 기운을 얻는다.
태어나고 사라짐에 ‘선택’이 끼어들 수 있던가. 피조물인 우리가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저마다의 다른 흉터와 각각의 서사를 품고 있다. 평생 누구를 받쳐주는 삶은 세상의 가장 따가운 생이다. 그러니 부단히 일한 우리를 두고 그리 가볍게 떠들어대진 말지어다. 받은 목숨대로 묵묵히 죽는 힘을 다해 사는 생인데 누구라서 남의 삶을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참았던 말을 털어놓고 보니 후련한 느낌과 민망한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그렇더라도 오랜만에 주인과 동행한 외출 길이 한결 가뿐하다. 벗을 땐 아무쪼록 가지런히 놓아주시기를…. 배려는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올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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