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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당신의 녹슨 방 / 채은숙

당신의 녹슨 방 / 채은숙

 

 

 

짙푸른 바다 위에 어둠이 내려앉는군요. 망망대해에 거대한 철선이 당당하게 떠 있습니다. 그 안에 철벽으로 지은 당신의 방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일렁이는 방 하나가 밝게 빛납니다. 책을 꺼내 읽어 보려 하지만 고단한 하루가 무거워 눈이 저절로 감깁니다. 당신은 물 위에 뜬 채로 잠을 청합니다. 파도가 높아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당신의 잠도 출렁거렸겠지요. 저는 지금 시간을 거슬러 반백 년 전의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멋진 외모를 지녔군요. 쌍꺼풀진 서글서글한 눈매에 깊은 눈동자가 매력적입니다. 강인한 턱과 우뚝 선 콧날이 남자답고, 진중한 말투와 꾹 다문 입매에서 과묵한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얼마 전 딸이 태어났지만 아직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갈 수 있으니 당신이 도착할 즈음엔 제법 젖살이 올라 토실토실해져 있을 것입니다. 집에 전화가 없던 시절이니 고생한 아내를 다독이는 일도 조금 미루어야하겠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아내는 이해심이 많은 여인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당신은 영민했다고 합니다.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아 낫을 목에 대고 죽을 각오로 고집을 부렸다지요. 당신의 부모님은 할 수 없이 중학교에 입학시켰고 산을 넘어 힘들게 다녔지만 학업은 고집만 부린다고 이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당신은 가구 공장에 취직하여 집을 떠났습니다. 적응을 하는가 싶더니 못 견디고 돌아왔다지요. 그곳의 환경이 유난히 깔끔한 당신에게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누추한 방에서 웅크리고 잠든 소년을 생각하니 가여운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바다로 간 것은 결혼한 직후였습니다.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은 감히 짐작하기 힘듭니다. 그곳이라고 얼마나 흡족했을까요. 단지 돌아올 수 없었을 테지요. 가장이란 무조건적인 희생이라는 것을 저도 조금은 압니다. 당신은 그리운 마음을 담아 가족들이 잠자는 방으로 길을 내고 밤마다 다녀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덕에 가족들은 문간방 전세 생활을 끝내고 방 두 개에 부엌이 딸린 아담한 집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요.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때 잠시나마 고단함을 잊었을까요.

당신은 다른 배가 잡은 고등어를 옮겨 싣고 육지로 수송하는 일을 합니다. 배를 탔으면 응당 선장을 해보고 싶을 법도 한데 기관장을 택했다고 당신의 아내가 말해주었습니다. 기관실에 조용히 있을 수 있고 기술을 배워 놓으면 나중에라도 쓸 수 있겠다 싶었겠지요. 이십 년 세월을 물 위에서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생일 같은 소소한 일상도 누리지 못한 채 긴 시간을 버틴 것은 순전히 가족들 때문이었습니다.

당신과 가족 사이에 이어진 길로 텔레비전과 전화기와 가스레인지가 보내져 왔습니다. 어느 해는 동화책도 끼어 있었지요. 태풍이라도 불어 닥치는 날에는 당신이 보내준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다의 안부를 확인했습니다. 안테나를 아무리 돌려도 화면은 흐렸고 눈앞이 캄캄한 날이 많았습니다. 늦게나마 전화벨이 울리면 그제야 당신의 아내는 가슴을 쓸어내렸겠지요. 아이가 더 늘고 자꾸만 자랐으므로 바다 위 철장 같은 방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했던 당신의 바람도 그 자리에 멈춰버렸겠지요. 그즈음 당신의 꿈은 새집을 짓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꿈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언덕 위에 근사한 양옥집을 지었으니까요. 자식들은 각자의 방이 생겼다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방은 없었습니다. 인동초가 꽃망울을 터뜨릴 때나 부추꽃이 필 때, 탱자가 익을 무렵이면 해풍을 머금고 한 번씩 다녀갔을 뿐이지요. 훌쩍 자란 자식들과 고단한 아내를 두고 여전히 넘실대는 푸른 방으로 당신은 돌아갔습니다.

감꽃이 후드득 지던 날 낡은 가방을 메고 당신이 육지로 돌아왔을 때 둘째 딸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안아 주지 못한 자식들은 낯설고 함께 하지 못한 세월만큼 서먹한 아내와 마주했겠지요. 젊음이 다 지나간 얼굴로 서로 서글펐겠지요. 고등학교를 마무리하던 교정에서 둘째 딸은 처음으로 당신과 졸업 사진을 찍었습니다. 비로소 출렁이지 않은 방에 몸을 뉘었으니 당신의 잠은 여전히 굽이쳤습니다. 아직 매듭짓지 못한 가장의 무게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밤잠을 흔들었을 테니까요.

언젠가 이이들과 함께 갔던 바닷가에서 해군이 사용했던 폐선을 보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페인트 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여다본 방은 철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곳이라 당신의 방도 이보다 나았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여름에는 철판에 열이 오르니까 가만히 누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꼼짝 않고, 숨도 참으면 겨우 잠들었다 하더라.”라고 당신의 아내가 딱 한번 말해 준 적이 있습니다. 남달리 정갈했던 당신이 이십 년 세월을 어떤 마음으로 버텼을지 그때서야 폐선과 함께 당신의 방이 떠올랐습니다. 어디 여름뿐이었을까요. 지금도 정박한 배처럼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잠든 모습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당신이 지내온 방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한 번도 궁금해 하지 않았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으므로 그려 볼 수도 없습니다. 아마도 강철로 쌓아 올린 곳이었겠지요. 한 사람이 누우면 빠듯할 공간에 옷가지 몇 개가 걸리고 책도 몇 권 자리했겠지요. 좋아하던 꽃과 나무를 키우는 대신 황막한 공간에서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파도에 몸을 밑긴 채 잠을 청해야 했을 테지요. 그러나 그 방으로 인해 당신의 자식들이 자랐습니다. 당신의 젊음을 제물 삼아 비바람을 피하고 단잠을 이루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두려운 바다에서 당신을 지켜준 것 또한 철벽으로 둘러싸인 그 방이었음을 압니다. 힘들었다고, 두려웠다고 넋두리 한 번 한 하신 당신의 묵묵함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편안하였습니다.

한때 바다를 호령했던 군선도 더 이상 대양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선적에서 폐선의 이름이 지워졌듯 당신의 이름도 선원수첩에서 사라졌겠지요. 누군가 머물렀을 방 또한 텅 비었습니다. 군데군데 녹슬고 아귀가 맞지 않아 퇴락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거울 같은 물 위에서 고요할 것을 명 받았습니다. 당신의 녹슨 방도 흔적 없어졌지만 제게는 영원한 용골로 든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