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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늦가을 풍경 / 진웅기

늦가을 풍경 / 진웅기

 

 

 

바람이 부니 길가의 아카시아 나무에서 일제히 잎새들이 쏟아져 날아오른다. 허공으로 흩뿌려져서 참새떼처럼 서로 맴돌고 춤추며 팔랑거린다. 그 짧은 한순간의 비상에 소리들을 지르고 기뻐한다.

산길로 들어서니 나무 사이에 싸늘한 공기가 돈다. 새로 떨어진 아카시아의 샛노란 이파리들이 쫙 깔려 황금의 카펫을 이루고 있다. 그 위를 나의 발걸음은 엄숙한 느낌으로 걷는다.

나무들은 잎이 반쯤 떨어져서 헤숭헤숭한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숲은 여름 동안 꼭 닫고 지냈던 밀회의 무거운 커튼을 지금 조금씩 열고 있다.

잎이 조금씩만 달린 저 가지들은 얼마나 보기가 좋으냐. 여름의 가지는 들어찬 녹음으로 숨이 답답하고 겨울의 나무는 춥다. 만추의 가지는 몇 개씩 헤일 수 있게 달린 잎새들이 동양화를 그려 놓고 있다. 그것들이 떨어지는 것이 아까운지 늦가을의 공기는 미풍도 없이 멈춘 듯이 늘 조용하다.

나무 밒에 쌓인 거무죽죽한 낙엽은 서럽다. 이제는 바람이 불어도 춤추지도 안혹 해가 비추어도 표정이 없다. 낙엽을 밟으면 아직도 늦게 우는 벌레와 함께 애수의 소리를 울린다. 그러나 서그럭거리는 그 소리가 왜 그런지 맑고 개운하다.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끌려 자구 걸어가진다.

그런데 보라! 여름에는 어설프게만 보였던 밑나무들이 이제사 뒤늦게 일제히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산면을 메운 샛노란 그 빛깔이 어쩐지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동안에는 큰 나무들의 그늘 속에서 햇빛 한번 제대로 못받고 지내왔다. 초라한 그 빈민의 모습은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나뭇잎은 햇빛을 받아야 단풍이 들고 단풍이 들어야 떨어지는 것인지 높은 나무들의 잎이 떨어지는 것인지. 높은 나무들의 잎이 떨어지고 늦가을의 싸늘한 햇빛이 비쳐들자 난쟁이떼 같이 웅크리고 있었던 잔나무들이 한꺼번에 금빛으로 변하여 불탄다.

길을 가다가 보니 길가에 길로 자란 갈대가 우거져 좍 이어져 있다. 불그죽죽한 빛깔의 그 무성한 잎새 위로 술처럼 하얀 이삭이 몇백 마리의 학이 내려와 조용히 노닐고 있는 것 같다.

산과 들은 어디서 조용히 비쳐드는지 모를 조명을 받으며 색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아니 문득 눈가에서 산들이 불이라도 밝혀진 듯이 환하게 물들어 있다.

여름에는 하나로만 보였던 나무들이 수없는 군중의 우글거림으로 보인다. 빨간 나무는 마음을 뜨겁게 태워주고 노란 나무는 가슴에 시원하게 스며든다. 아직도 여름 그대로의 초록색은 유다른 쌈박함을 준다. 그러나 산에 나무를 심을 때 누가 가을의 색을 생각하고 배치하였으랴. 이곳의 산에는 연갈색이며 진갈색, 흑갈색, 혹은 주황의 나무들이 들어 차 있는데 그것들이 가을 해 속에 불타면서 사람의 가슴도 함께 태운다.

가을의 산야는 왜 저렇게 호화롭고 눈부신가. , 여름의 꽃은 나비와 벌을 부르기 위하여 아름답다. 추위와 아픔에 몸은 떨면서 잎새들은 있는 대로 미를 뿜어내고 환호를 한다.

누가 가을을 쓸쓸하다고 했는가. 서러워할 일이 있으면 무더운 여름에 서러워하자, 가을에는 저 고운 나무들과 함께 취하자.

하루의 밝음과 어둠이 바뀔 때 하늘이 붉게 탄다. 뜨거운 여름이 가고 만물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이 오려고 하는 그 갈피에서 산이 벌겋게 물든다. 낮 동안에 상했던 마음을 시뻘건 노을이 달래주듯이 무더위 속에서 차갑게 얼었던 가슴을 찬란하게 물든 저 산야가 녹여준다. 시름에 겨운 마음을 한잔의 술로 풀듯이 눈에 삼삼한 나무들이 무거운 머리를 식혀준다.

아니다. 멀쩡한 가슴에 붉은 하늘이 뭔지 모를 애수를 불러일으키듯 찬바람 속에 핏빛으로 물든 산야가 조용한 마음에 서글픔을 눈뜨게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됐든 가을의 산과 들은 바쁜 우리를 자꾸 끌어들이려고 한다.

밤에 길을 가니 검은 어둠 속에서 온 산의 나뭇잎이 쏴아쏴아 하고 통곡한다. 사람은 저마다 따로따로 태어나고 제각기 다른 시각에 혼자 죽어 간다. 자연의 목숨들은 때를 정하여 한꺼번에 태어났다가 이제 저렇게 함께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뭐 조금도 서러워할 것은 없다. 사람의 눈에는 죽음이 검게 보이지만 자연은 그것이 저토록 눈부시고 찬란한 것을.

집에 돌아오다가 길가에 피어 있는 국화꽃을 보았다. 방사선을 뿜는 그 꽃은 차가운 공기를 먹고 더욱 싱싱하고 아름다우며 이파리까지도 새파랗다. , 추위로 하여 피는 꽃도 있구나. 사람의 서글픈 재산도 저렇게 뒤늦게 좀 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