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밟다 / 민명자
낮부터 바람결이 심상치 않았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바람이 휘익 휩쓸고 지나간다. 은행잎이 한꺼번에 떨어지면서 노랑나비 떼처럼 허공을 난다. 이십여 마리가 족히 됨직한 비둘기 떼가 덩달아 솟구쳐 올라 하늘에서 한바탕 원무를 춘다.
어스름한 저녁, 조금씩 흩뿌리던 비가 제법 내린다. 아파트 초입이다. 어느새 가을이 깊어가건만 미처 느낄 새도 없이 계절을 흘려보냈다. 단풍나무가 늘어선 길을 지난다. 그런데 뭉클, 미끌미끌한 촉감이 발길에 와닿는다.. 발밑을 내려다본다. 물에 젖은 단풍잎들이다.
아직 숨을 쉬고 있을 것만 같아 차마 밟기 안쓰럽다. 발자국을 비키면서 보니 본체에서 떨어진 단풍잎들, 영락없는 별무리다. 천상의 별이 지상으로 낙하한 걸까. 어디로 가는 숨결들인가. 귀천(歸天)이라도 하려는가.
새 봄 한 나무에서 태어난 이파리들은 각기 제 생을 살다 간다. 어떤 잎은 꽃도 피워보기 전에 누렁 잎이 되어 떨어지고, 어떤 잎은 푸름 더해가며 나무의 숨결이 된다. 그러다 가을 되면 어미 품을 떠난다. 낙엽이 가는 길도 제각기 다르다. 나무의 거름되어 새 생명 틔우거나,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거나, 길거리 휘돌다가 쓰레기로 청소부의 자루에 담겨 불구덩이로 간다. 운 좋으면 소녀의 책갈피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도 있다.
한때는 나무의 영광이었다가 순간에 조락하여 한 생애 마감하는 낙엽. 짧은 생명 붉게 태운 영혼 차마 밟을 수 없던 저녁. 시 한 편을 쓰고 시어의 마디들을 짚어본다.
밟힌다, 밟힌다, 별
밟는다, 밟는다, 별
생명의 가지에 붙어 활활 타는 영혼이었다가
찬란하게 허공 밝히다가
하느님 손에 등 떠밀려
무한 낙하.
길바닥에 제 몸 얹고 누운
단풍잎 떼
영락없는 별무리다.
가을비 얼굴 때리는
어둑한 밤
차마 밟을 수 없어 발밑 조심
피해 보지만 피할 길 없다.
더러는 미끌미끌한 숨결 질척이고
더러는 바스락 바스락 낮은 신음 지르며
뭇사람의 발길에 잔뼈 묻는 짧은 생애
어두운 밤길 붉게 밝힌다.
공(空)으로 돌아가는 단풍 잎.
―졸시 「별을 밟다」 전문
가을은 허공을 밟고 떠나는 모든 존재들에게 송별사를 쓰게 하는 계절이다.
빈 고요에 몸 맡기고 먼 길 나선 낙엽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렇게 홀홀히 길 떠나셨다.
저 낙엽들, 우주 어느 한 구렁이나 창공에서 서늘한 영혼으로 떠돌다가 윤회의 빗줄기 타고 이 세상 초록으로 물들이는 생명의 빛으로 다시 오려니.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리니.
색즉시공 공즉시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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