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 김길영
철 이른 봄이다. 냉이꽃 앞세워 오는 봄의 길목. 아직 버드나무 가지엔 잎눈도 트지 않았다. 햇살 내리는 산야에는 잠자던 생명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숨을 고르는 중이다. 땅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하얗게 번진다.
포도밭 묵은 가지를 전정하는 날. 싸늘한 날씨 탓인지 밭을 향한 내 발걸음도 가볍지 않았다. 농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갑작스런 까치들의 습격을 받았다. 평상시에 보던 까치들의 행동이 아니었다. 눈을 부릅뜨고 가슴을 드러내 보이며 사납게 소리를 질러댔다. 때로는 발을 동동 구르는 시늉도 했다. 뜻밖에 그들의 공습에 놀란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못 둑으로 물러나 그들이 왜 저렇게 성난 모습을 보이는지 살펴봤다. 포플러 가지위에 삭정이로 엉성하게 엮은 까치집 한 채가 보였다. 평상시에는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며 사는 날짐승 이상으로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곳에 까치가 제 영역으로 틀어잡고 있는 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유심히 살펴보니 까치의 암수가 수시로 드나들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무엇인가 다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외딴집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서 나누는 대화처럼 당황스럽고 긴급한 상황 같이 느껴졌다. 까치의 암수는 아침밥도 거른 채 핏발선 눈빛이다. 둘이서 주고받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가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둥지엔 필시 새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올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둥지에 까치가 웅크린다. 날개달린 짐승들은 알을 품을 때 공통적으로 부드러운 앞가슴 털을 뽑아 알을 덮는다. 그리고선 알몸으로 생명을 데운다. 내가 철없던 어릴 시절, 암탉이 둥지에 들어 알을 품고 있을 때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신기하게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집 암탉은 나를 경계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눈이 마주쳐도 눈만 껌벅거리고 가끔 고개를 갸우뚱거렸을 뿐이었다.
내 눈과 마주하면서도 별로 경계하지 않았던 암탉에 비하면, 몹시 낯설어하며 경계하는 까치의 모습이 아릿하고 조심스럽다. 오늘, 눈을 부릅뜨고 달려든 저 까치가 나를 이기려고 덤벼든 것도, 나를 해치려 달려든 것도 아닐 것이다. 평소에는 사람이 무서워 근처에도 오지 않던 그들이 아니던가.
기를 쓰고 덤비는 저 까치도 새끼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며, 종족 보존을 위한 필사의 저항은 어느 미물에게도 있을 것이다. 오늘 포도넝쿨 가지치기는 다음날로 미루기로 했다. 농사일도 때가 있는 것이지만 가지치기를 며칠 늦춘들 어떠리. 까치가 짖어대거나 말거나 포도넝쿨의 전정을 못할 일도 아니다. 내가 하는 일에 누가 간섭할 사람도 없다. 또 기왕에 일터에 나왔으니 작업을 계속해도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나와 같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자연이 뗄 수 없는 공동운명체라는 걸 이제야 깊이 깨달았다. 까치와 나는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음이다. 나의 작은 양보는 당연하다. 까치뿐만 아니라 내가 미처 모르는 수많은 생명들도 나와 같은 곳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는 것이다. 삶의 터전이 하루가 다르게 좁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생명의 개체가 얼마나 많겠는가. 오늘 까치들의 성난 모습에서 전율을 느낀다. 살아있는 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의 탄생은 위대한 것이다. 나는 까치들의 불안한 눈빛에서 벗어나 새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한나절 내내 그들이 안정을 되찾고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지구는 사람들만의 삶터가 아니라는 걸, 천만종의 생명체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마음속에 새겨본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고통을 안고 산다고 했다. 까치 역시도 종족보존을 위한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봄이라 하지만 조석으로는 손발이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에 먹잇감도 변변치 않는 때다. 오직 새끼를 세상에 태어나도록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엉성한 마른 가지 사이로 언 듯 언 듯 보이는 어미 까치가 애처롭게 우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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