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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나를 만나는 곳 / 임춘희

나를 만나는 곳 / 임춘희

 

 

저만치서 꼬마가 달려온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급히 오느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 센바람 같이 다가온다, 그토록 반가운 것인가. 여태 어떻게 참았을까.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내 주위를 빙빙 돈다. 어지럽다며 그만하라고 해도 소용없다. 그것뿐인가. 두 손을 허리춤에 얹고 갈지자 걸음걸이로 까딱까딱 걸어가다가 획 돌아보며 ‘메롱~~’ 약을 올린다. 나는 얼른 달려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린다. 원피스 자락이 파란 하늘 한복판에서 팔랑거린다.

꼬마와 손을 잡고 벤치에 앉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우리를 감싼다. 파란 하늘과 길가에 쭉 늘어선 코스모스, 그리고 맨드라미가 둘이서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호응에 신이 나서 이야기가 실타래 풀리듯 술술 흘러나온다. 바다도 부르고 바다 너머에 점잖게 앉아 있는 산도 부른다. 우리 두 사람의 넋두리에 방청객이 되어 달라고. 머리 위에 있는 해가 나는 왜 끼워주지 않느냐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진다. 주위를 둘러본다. 발밑에서 찍찍 소리가 난다. 내려다보니 빨간 논두렁 동게 다.. 일광욕하러 바다를 빠져나왔다가 한자리에 끼고 싶은 건가. 그래, 다 좋아. 우린 어느새 한팀을 이루어 구월의 오후를 즐긴다. 우선 내 속이 답답해서 살 수 없으니 내 말 좀 들어 보라며 이야기보따리부터 풀어헤친다.

난 그동안 속이 너무 답답했어. 내가 늙었나 봐. 누가 속을 태우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답답할까. 아니야, 삶에 리듬이 없어진 거야. 음표처럼 오름내림 그리고 강약이 있다면 스릴 있겠지. 일과 마치고 나면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 꼼짝 않고 소파에 누워 있다가 잠들고 또 아침을 맞고 일터로 나가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런 생활이 몸에 익숙해진 거야. 이렇게 살다가 한 인생 끝나겠지.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 차라리 눈물이라도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소리 내어 펑펑 울고 나면 속이 좀 후련하기도 할 텐데, 언제부턴가 눈물이 말라버렸어.

엊그제가 주말이었는데 자꾸만 달력을 쳐다보았지. 주말에 물 때가 되어야 이곳 남해로 달려올 수 있거든. 사무실 일 아니면 보따리 싸서 아무 때나 당장 달려오고 싶었지. 정수기 곁을 떠날 수 없었어. 속이 답답해 찬물을 자꾸 마셔대야 하니까. 지인이 남자를 사귀어 보라고 하지만, 이 나이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찾기가 쉬운 일인가. 말로야 무슨 일을 못 하겠니. 또 어떤 친구는 애완견 키워보라 하대. 그런데 그것도 쉬운 게 아니야. 오늘처럼 남해에 너를 만나러 올 땐 곤란하지. 일일이 데리고 다닐 수 없는 일이잖아. 지금 당장 키우는 화초들도 짐인데. 며칠 여기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보면 목이 말라 온몸을 비틀고 있을 땐 미안하지.

그냥 일하고 운동으로 건강 챙기며, 시간 나면 일상을 벗어나 여행이나 하며 사는 게 좋을 것 같아. 구름처럼 바람처럼 훌훌 세상 곳곳을 다니며 타인들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인생 공부하는 거지 뭐. 왜 이런 말도 있잖아. 여행은 나를 찾아가는 모험의 행로라고. 나는 말이야. 일할 때도 좋지만 여행할 때가 더 좋아. 일한 뒤에 맛보는 여유랄까. 무엇보다 남해가 좋아. 일상에선 일에 치여 아무 생각이 없는데, 여기 오면 해 맑은 너를 만날 수 있잖아. 특히 바닷물이 주~~욱 밀려간 갯벌에서 너와 뒹구는 순간은 내 인생에 최상이지. 어떨 땐 바닷물이 빨리 들어와 눈물이 날 때도 있었지. 티 없이 맑은 너와 더 놀고 싶어서. 현실은 늘 외로운 순간들이니까. 몸은 바쁘게 움직여도 가슴은 텅 비어 있단 말이야.

무릎 위에 뜨거운 액체가 뚝뚝 떨어진다. 난 꼬마에게 내 마음이 들킬까 얼른 고개를 바다로 돌린다. 조가비 크기만 한 꼬마의 손이 내 등을 토닥거린다. 그 마음 알았으니 함께 조개 잡으러 가자고 내 손을 잡아 이끈다. 바다는 벌써 훤히 자신의 몸을 다 내놓았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난 꼬마와 신이 나서 장화 신고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갯벌로 들어간다.

내 안의 아이가 세상에 찌든 이야기 들어주는 게 엄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