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역지우莫逆之友 / 김영관
설날이었다. 코로나 19의 극성으로 5인 이상 모이지 말라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아침 일찍 멀리 사는 아들 가족의 영상 세배를 받았다.
대구에 사는 딸 가족은 친가에 먼저 세배를 드리고 11시쯤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부부와 합치면 여섯 명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아이들이 세배하는 동안 딸 내외는 다른 방에서 대기하다, 손녀 둘이 세뱃돈을 들고 자리를 뜨자, 곧 바로 딸 내외가 절을 하곤 저희들 집으로 가 버렸다. 두 손녀만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 것이다. 세상사 이 무슨 장난인지, 촌극인지 알 수가 없어 기분이 묘했다.
저녁밥을 먹고 올해 고등학생이 되는 큰 소녀와 나는 방에서 아이의 장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부산에 사는 육십 년 지기 죽마고우였다. 나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설은 잘 쇠나?” 그 순간 느닷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당황했다.
“야 인마, 너 내 친구 맞나?” 잔뜩 화난 목소리였다. 옆에 앉아 있던 손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 설은 잘 쇠나? 집안에 별일 없고….” 바쁘게 방을 나서며 그의 말을 막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그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야이 자슥아!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긴데. 너 그러는 거 아니야…,” 응접실에 앉아 있던 집사람도 전화기 너머의 소리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주시했다. 볼륨을 줄일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어릴 적 동네 친구로 만나 육십 년 동안 우정을 이어온 사이였다. 그는 젊을 때부터 입담이 좋은 데다 친구들 사이에서 의리의 사나이로 통했다. 그와 나는 직장 생활과 가정을 이루면서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도, 이순耳順이 넘어서는 일 년에 한두 차례씩 부부가 함께 만나 이틀을 허물없이 지내는 죽마고우였다.
그가 삼 년 전에 허리 수술을 했다. 그 무렵 부부동반으로 어릴 적 자주 찾던 송도해수욕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때 그는 허리와 무릎 통증으로 무척 힘들어하면서도 술을 좋아했다. 그의 부인의 걱정을 귀담아들으며 생각했다. 만남도 중요하지만, 앞으론 마음을 나누는 전화 통화를 자주 하기로 다짐했었다.
최근 이 년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아니 내가 의식적으로 피한 것이 사실이었다. 통화할 때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번 내려와라’ 그때마다 미루었다. 봄엔 여름으로, 여름엔 가을로, 지난가을엔 구정 전에 한 번 가겠다고 답했다. 그때마다 그가 말했다.
‘야,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노’ 그런데 어느새 설을 맞이한 것이다. 한참 넋두리를 늘어놓은 그가 전화를 끊었다.
친구를 손가락으로 꼽아 봤다. 손가락 두 개만 꼬부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가 엄지손가락이었다. 그의 말을 되새김질해 보니 내면에 끈끈한 우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막역지우라고 말은 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바로 나였다. 미안했다.
밤이 이슥할 때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로 갔다. 설렁한 그네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영관아, 아까 미안했다.” 나의 말과 그의 대답이 뒤섞였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가 버벅대고 있었다. 형님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술을 마셨다고. 술에 취하니 살아온 자신의 삶이 후회되고 미워지더라고, 그러다 가장 먼저 내가 생각나서 한번 만나 하소연하고 싶은 생각에 폰 번호를 눌렀는데 갑자기 울컥하는 가슴 속 응어리를 그렇게 토했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술병酒病이 크게 사고를 쳤다고, 집사람한테 된통 당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와의 우정을 떠올렸다. 그는 젊어서 나에게 정신적으로 큰 힘을 준 둘도 없는 절친이었다.
내가 미안했다. 마음속으로 빌었다. 친구야 우리 건강하자, 그리고 자주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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