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배 / 서해숙
어머니는 지금 혼자서 꽃구경을 다니시는 걸까? 평온한 모습으로 흉배에 놓인 목단 꽃과 나비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바른 자세로 꼿꼿이 누운 어머니의 가슴팍에는 붉은 빛깔 목단 꽃이 몇몇 송이 피어 있고 노랑나비 흰나비가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영안실만 아니었다면 엄마의 손을 끌어안고 훨훨 꽃놀이를 가자하고 싶었다.
뽀얗게 분칠을 하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어여쁜 모습의 엄마가 낯설었다. 우리엄마가 그렇게 고우신 줄을 영안실에서 알게 되다니 가슴이 먹먹했다. 생전 처음 본 엄마의 화장한 모습을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자세히 보느라 염습사의 설명 따윈 듣지도 않았다.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오십여 호 되는 마을에서 우리 어머니가 가장 늦게까지 비녀를 꽂고 다니셨다. 화려한 비녀도 아니고 그냥 은비녀였다. 오직 자식 공부 뒷바라지 말고는 안중에도 없던 당신은 화장품 자체가 없었다. 가끔 자기엄마 화장품을 바르고 오는 친구들이 몹시 부러웠다. 삼촌이 결혼하자 숙모의 화장품을 몰래 바른 적이 여러 번 있을 정도였다.
동생의 결혼식 날 고종사촌 언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딸들이 둘이나 있으면서 고운 외숙모를 저런 모습으로 혼주 석에 앉게 했냐고 나무랐다. 시집갈 때까지 닭 손님으로 살았던 고종사촌 언니가 정색을 하고 나무라서 더욱 억울했다. 엄마는 당신을 치장하는 일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날 아침 공직에 있는 다른 형제 하객들 눈이 있으니 미장원이라도 가자고 그렇게 졸랐건만 내 새끼만 잘나 보이면 되었지 무슨 흠이냐고 눈을 흘기셨기 때문이다.
고향의 우체국에서 일을 한 언니는 노골적으로 엄마가 근무처에 볼 일을 보러 오는 걸 싫어했다. 엄마는 내내 그 말씀을 하시면서 서운해하셨지만 나는 언니를 백 번 이해했다. 정미소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돕느라 엄마는 늘 등겨가 묻은 옷을 입고 다니셨다. 특히 이마가 반듯하고 눈이 크며 반짝였던 엄마는 그 흔한 파운데이션과 립스틱만 약간 발랐어도 참 예뻐 보였을 것이다. 화사하게 분을 바르고 잘 익은 복숭아 같은 볼연지도 곁들인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어찌 그리 고운 모습을 숨기고 계셨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도 자신을 치장하지 않았으니 아버지께서 늘 한 눈을 팔았다는 생각에 이르자 어머니를 깨우고 싶어졌다. 따져 보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연휴를 맞아 옷장정리를 했다. 남편이 입버릇처럼 입지 않는 옷은 버리라고 했었다. 그래도 혹시 하면서 늘 끌고 다닌 옷 몇몇 보퉁이를 버렸다. 마지막에 제일 화려한 모습으로 떠나신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이다. 어려운 시절에 큰 맘 먹고 사들인 옷들은 20년이 넘어도 버리질 못했다. 이 서랍 저 옷장을 뒤져 마법에 걸린 것처럼 버렸다.
노인들은 대부분 자기물건을 못 버린다고 한다. 나 또한 사연이 있는 옷은 꺼냈다가 도로 넣기를 반복했었다.. 현재 우리는 새 옷을 사 입을 형편이 못 된다. 그러나 후배네 옷 매장에서 몇 개의 옷을 한꺼번에 샀다. 폭탄세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값이 만만찮다. 신들린 사람처럼 권하는 대로 마구 샀다. 우리 형편을 헤아리면 티셔츠 한 장이라도 손이 떨릴 만큼 가격대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것도 현금으로 결제를 하면서 하늘에 계신 엄마의 한풀이를 대신하듯 마구 샀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잣집에 시집온다고 친인척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종갓집 맏아들이었다. 외가동네 사람들은 쌀밥을 실컷 먹겠다는 이유로 엄마의 이른 혼례에 박수를 보냈단다. 고질병마에 시달리던 할아버지는 외가의 담장 너머로 보이는 처녀의 목 윗부분만 보고 혼례를 일사천리로 진행했단다..
중병으로 아버지를 대학병원에 모시게 되자 어머니는 요양원에 보내 달라고 노래를 부르셨다. 요양보호사가 주 5회5 집에 왔지만 주말 이틀이 무섭다고 했다. 우리를 공부시킬 때는 남자 어른도 무섭다던 범 바위 길을 혼자서도 잘 다니던 어머니였다. 엄마는 그 흔한 계모임 하나 없었다. 교통사고로 근 오년을 앓은 어머니의 하소연이 지겨워 돌아가시면 절대로 그리워하지 않으리라 맹세했건만 매 순간순간마다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아직도 강가의 그 요양원에 가면 어머니가 반기실 것만 같다.
딱한 엄마를 보다 못해 어느 해 화장품 몇 가지를 사다 드렸더니 화장대 위의 전시품으로 전락시키셨다. 안 발라 봐서 냄새도 싫다고 하셨다. 그랬던 엄마가 당신이 손수 지으신 모시 두루막 가슴팍에 수놓은 꽃이 너무나 화려했기에 그 화사함이 차라리 서러웠다.
장례식 날 산소에서 형제들이 고인은 꽃을 좋아하셨으니 묘지 앞에 플라스틱 꽃 말고 진짜 꽃을 심어 드리자고 했다. 나는 차마 흉배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수많은 꽃을 문양으로 수놓아 안고 가셨다고 말하면 울음바다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꽃만 보면 엄마의 흉배가 생각난다. 핸드폰을 두고 영안실에 모였기에 그 귀한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남기지 못한 게 한스럽다.
이제는 매순간 곱게 차려입고 다닐 것이다. 어머니 먼 옷 두루막 흉배 꽃을 내가 반쯤 떼어 와서 가슴에 달고 살 것이다. 어머니처럼 아낀다고 가슴 움츠리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평소에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가 즐기도록 하지 않으셨으니까 우리 엄마는 어리석은 엄마였다. 봄이 오면 꽃문양이 예쁜 옷을 또 여러 벌 더 장만하리라 다짐해 본다. 화장을 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왜 엄마가 예쁘다는 생각을 할 엄두조차 못 냈을까? 유년시절 아버지의 여자가 ‘코티분 냄새’를 지독하게 풍겼기 때문일까?
아들과 딸의 기억속에 아름다운 엄마로 남고 싶어서 평상복도 고운 옷으로 입고 지낼 참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교사들이 버린 앞치마를 아직도 부엌에서 입는 나는 백화점으로 향한다. 가슴팍에 화사한 문양을 넣은 예쁜 앞치마를 마련할 것이다. 지금 볼에 흐르는 건 내 엄마의 바보 같았던 삶 덕택에 우리 사 남매 남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는 응답의 흔적일 것이다. 가슴팍을 쓸어 본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가슴깊이 담아 본다. 나는 어떤 흉배를 달고 저승으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