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철역 풍경 / 김한성
길 안내
주민센터 앞이다. 소년이 등 굽은 할머니를 부축하며 같이 가고 있다. 잡은 손이 무척 다정해 보인다. 요즘은 할머니와 손자가 다정하게 가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뒤따르는 내 마음마저 훈훈해진다.
“학생 고마워요. 혼자 찾아오려면 종일 걸리겠는데, 지하철 놓치면 안 되니 어서 가 봐요.”
“걱정 마세요. 약속 시간까지 충분히 갈 수 있어요.”
친손자가 아니었다.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할머니를 혼자 보내지 못해 손을 잡고 길 안내를 한 것이다. 가던 걸음을 돌려서 도움을 준 소년을 보내는 할머니의 모습에 감사와 아쉬움이 묻어 있다. 지하철 입구를 향해 달려가는 소년의 급한 모습이 걱정되는지 학생이 사라진 입구에서 눈길을 쉽게 돌리지 못한다.
경로석
지하철을 탔다. 경로석에 남학생 세 명이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한낮이어서 군데군데 빈자리가 눈에 띈다. 이 학생들은 왜 경로석에 앉아 있을까? 궁금하다.
다음 역에서 노인 두 분이 탔다. 학생 두 명이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한다. 두 분이 앉으면서 못마땅한 표정이다.
“요사이 학생들은 참 버릇이 없어. 학교에서 뭘 배우는지. 경로석에 앉아 가지를 않나. 두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 학생은 꼼짝하지 않는군. 무슨 배짱인지 참.”
성질 급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마구 쏟아져 나오자 일어서 있던 학생이 머뭇거리면서 말한다.
“할아버지, 이 친구는 장애인입니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잠시 굳어진다.
“학생 미안해.”
“괜찮아요. 늘 있는 일인데요.”
어색하던 분위기가 대화를 통해 서서히 풀리고 있어서 다행스럽다.
몇 정거장을 가는 사이 지하철은 몇몇 승객이 서서 갈 정도로 빈자리가 없다. 다음 역에 열차가 섰다. 내리는 승객은 없는데 만삭의 임산부가 탔다. 아까 열을 내던 할아버지가 일어서면서 자리를 양보한다. 괜찮다는 임산부와 앉으라는 할아버지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진다. 할 수 없다는 듯이 앉는 임산부에게 할아버지가 말한다.
“그래도 둘이 편하게 가는 게 낫지.”
지하철 안이 따스한 기운으로 가득 찬다. 노인과 장애인과 임산부가 앉아 있는 경로석의 모습이 정겹다.
에스컬레이터
버스를 탔다. 창가에 앉았다. 창이 커다란 액자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림 속의 모습처럼 또렷이 보인다. 남부정류장과 수성대학교를 지나 신호에 따라 버스가 섰다. 지하철 입구 바로 앞이다. 할아버지 한 분이 눈에 들어온다. 무슨 일인지 무척 불안한 모습이다. 계단은 없고 에스컬레이터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노인은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우왕좌왕하고 있다.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다. 다른 사람이 내리고 오르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다.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하지만 마음뿐이다.
소녀가 할아버지 가까이 다가온다. 학생이다. 다리를 다쳤는지 목발을 짚고 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할아버지를 도울 모양이다. 학생은 다른 사람이 타는 모양을 보며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표정을 보니 무척 진지하다. 할아버지의 표정도 심각하다.
버스를 내려 소녀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다. 그러나 신호가 바뀌자 버스가 출발한다. 너무 궁금해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빨리 걸었다.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본 할아버지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고 있다. 조금은 어색하지만, 손잡이를 꼭 잡고 마지막 내릴 때 약간 뒤뚱거리긴 했지만 잘 오르고 있다. 그러더니 또 한 번 내려가고 있다. 몇 번이나 오르내릴 모양이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소녀의 아름다운 마음씨는 할아버지의 미소 속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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