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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희망을 읽다 / 이경재

희망을 읽다 / 이경재

 

 

 

1막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시골길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나온다. 블라디미르는 계속해서 모자를 벗었다 썼다 하고 에스트라공은 멈추지 않고 구두를 벗었다 신었다 한다. 둘은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없네”

“보여줄게”

“보여줄게 없네”

“다시 한번 신어보게”

“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하루가 끝나 갈 무렵 한 소년이 와서 오늘 고도는 오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2막

이튿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동일 인물들이 1막과 다름없는 상황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소년이 와서 고도는 오늘도 오지 않는다고 알린다.

 

이 지구에서 브라키오사우루스가 긴 목을 쭉 빼고 높은 나뭇가지의 잎을 뜯어먹을 무렵 지금은 무대에 서 있던 뼈만 앙상한 나무 하나 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었다. 극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 먼저 생각하는 자와 에피메테우스/ 나중에 생각하는 자형제에 비유된다. 블라디미르의 모자는 ‘생각’을 에스트라공의 구두는 ‘행동’을 뜻 한다 여겨진다.

어떤 상황이 닥쳐왔을 때, 깊이 사유하며 앞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블라디미르와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에스트라공, 둘은 뭔가 열심히 이야기를 하나 서로 잘 알아듣는 것 같지 않다. 아니 오히려 각자 허공에 대고 독백을 하고 있다는 편이 옳을 듯싶다. 사고방식이 다르고 대화도 전혀 통하지 않는 이들에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고도Godot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올지 오지 않을지도 모른 채 언제부터였는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고도는 누구, 혹은 무엇일까? 시대에 따라 신God이라든가 자유, 미래, 죽음, 현대인 등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작가 사무엘 베케트조차 “내가 알면 작품에 썼겠지”라고 했다니 말이다. 어쩌면 삶을 견디게 하는 그 어떤 것이나 또는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막연하게 그려볼 뿐이다.

우리는 지금 3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중이다. 상대는 바이러스다. 중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의 90%를 감염시킨 이 질병으로 4000만 명 가까이 전염되고 110만 명 넘게 사망했다. 항체도 백신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집단의 규범을 좇아 죽어도 입 가리개를 쓰겠다는 대구 시민인 나와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해 죽어도 마스크를 못 쓰겠다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민인 그를 비롯한 이 행성 거주자들에게 고도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신이라 답할 성싶다.

일상을 언제 회복할지 모르는 나날이 열 달째 이어지고 있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와 푸른 잎이 우거진 보경사의 여름은 화석이 된 지 오래다. 가끔 옆지기와 더불어 서식지를 벗어나 동성로에 출몰해 영화를 보고 외식을 즐기며 책과 같이 삶의 터전으로 되돌아오던 소소한 하루가, 언젠가는 아이슬란드의 다이아몬드 비치에 서서 유빙을 보겠노라 던 원대한 꿈이 되어 버렸다. 신문이나 TV 등의 매체로부터 이르면 연말에 코비드-19의 백신 공급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을 전해 받는다. 동시에, 취소와 연기가 다반사인 시대엔 기대를 낮추는 게 정신 위생에 좋고 허황된 낙관은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며 끝없이 기다릴 것을 요구당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의 3막 4막…, 을 집필했었다고 해도 고도는 역시 오늘 오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인간이란 각자 오지 않을 자신의 고도를 기다리고, 서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나누며 하루하루 죽어가는 존재라고 입을 모은다. 불의에 공격이라도 당한 양 맥없이 나동그라지는 내 의식이 가까스로,『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죽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상어와 싸우며 하는 말,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말을 붙든다. 사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금방 괜찮아지고 그래봐야 또 힘들어진다는 지독한 아이러니 앞에서도, ·금·방 ·괜·찮·아·지·고에 방점을 찍는다. 간절히 원해서 일까. 어느 먼 항성에 안착했을 사무엘 베케트가 전송하는 그의 희곡의 짧은 후일담을 나는 꿈결인 듯 생시인 듯 읽기 시작한다.

 

에필로그

시골길, 흰 눈을 소담스레 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무대 위에 소년이 씩씩하게 등장한다.

소년: (밝은 목소리로 막 뒤에 앉아 있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향해 외친다) 고도 씨가 지금 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