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 강찬중
고향에 다녀오려고 열차 왕복승차권을 예매하였다. 고속열차가 아니더라도 기차여행은 공간이 넓고 자유로워서 그런대로 매력이 있다. 고향을 찾은 게 퍽 오랜만이다. 차창으로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과 낯익은 풍경들에 눈길이 머문다. 근년에 발전이 되었다지만 농촌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가 더 많아 낯설지 않다.
‘국수와 메밀묵을 해놓고 아들을 기다리던 머리가 허옇던 어머니! 이때쯤 골목에서 서성거리실 텐데……’……’ 오늘따라 그 환영이 눈에 선하다. 모처럼 고향을 찾아도 어머니도 안 계시고 고향을 지키는 친구 한 사람도 없으니 시간이 나도 낯선 곳처럼 갈 곳도 마땅치 않다.
이것저것 고향내만 묻히고 아침에 내려오는 기차를 탔다. 무궁화 2호차 32호석, 지정좌석이다. 자리에 갔더니 어디서 타고 왔는지는 알 수 없어도 한 아주머니가 두 자리를 차지하고 길게 누워서 자고 있지 아니한가. 어찌할까?
잠든 사람을 깨워서 “이 자리는 내 자리요” 하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마침 입구에 빈자리가 있어서 거기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정거장 안내를 한다. 여기는 시 지역이어서 많은 사람이 탈 텐데……. 한 분이 올라와 “내 자리요” 한다. 일어나 지정좌석으로 눈길을 돌리니 역시 자고 있다. 또 빈자리를 찾았다. 다음 역에서도 또 임자에게 내주어야 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며 뒤통수가 화끈거린다. ‘저 사람은 승차권도 안 샀나?’ 하고 핀잔을 주는 것만 같아 참으로 혼란스럽다. 다음에 또 비켜주더라도 빈자리를 찾아 무료함을 달래려고 포켓북을 펼쳤다. 김상용의 <외로움의 지류를 건너다.>라는.> 편지글을 모은 책이다. <잉카의 악사들>에 눈이 멎었다.
‘지하철 환승역인 합정역에서 남미 망토를 걸친 볼리비아에서 온 6인조 메스티조 악사들이 민속음악을 연주하면서 CD를 판매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9시에 연주를 시작하고 12시에 멈추고 한 20여 분 뒤에 다시 연주를 시작한다. 며칠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다큐멘터리 작가가 리더에게 12시에 휴식시간을 갖지 말고 관객이 많은 그 시간에 연주를 계속하면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하였다. 며칠을 지켜보아도 역시 그대로다. 그날도 12시에 연주가 멈춰졌다.
그때 머리를 예쁘게 땋은 20대 초반의 한 아가씨가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로 연신 바닥을 두드리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여학생이 리더를 찾았다. 사회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며, 늘 12시에 합정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단다. 이 연주가 시작되고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돌아가다가 여러 번 낭패를 당했다고 했다. 리더는 그 여학생이 지하철 연계 구역으로 들어서면 연주를 멈추기로 결정하였고 다른 악사들도 당연히 받아들였다.’
참 따뜻하다.
한 시간쯤 지났나 보다. 벌써 열차는 종착역을 알린다. 지정좌석에서 누워 자던 아주머니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머리를 매만지며 내릴 채비를 하고 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여기가 내 자리요” 하고 한마디의 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빈자리만 찾아서 헤매다가 벌써 목적지에 온 것이다. 그래도 빈자리가 있어서 다행이었고, 따스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긴 여정을 돌아다본다. 나로 인하여 빈자리를 찾아 서성거렸던 사람은 없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거들먹거리지는 아니했을까?
칼릴 지브란의 시구가 떠오른다.
“그대들은 누구에게나 잘못을 저지른다. 또한 그대 자신에게도……”
오늘은 ‘행동으로 사랑하라’는 말이 크게 들리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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