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나를 찾아 / 우남희
길고 긴 밤을 뒤척인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것이 고역이란 말을 듣긴 들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책과 노트북, 일회용 커피까지 챙겨왔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각다분한 일들을 잊고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는데 불을 꺼야 하는 분위기다. 밤하늘의 별처럼, 아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처럼 정신이 또렷한데 어떻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란 말인가.
2020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내 안의 나를 찾아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운전할 수 있으니 어디든 다녀올 수 있지만 용기가 없었다. 여행의 적기는 해설사의 휴무기간인 2월로, 간다면 이 기간에 다녀와야 한다. 떠나자는 마음과 새삼스럽게라는 두 마음이 널뛰었다. 이러다간 평생,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것 같아 먼저 가까운 지인에게 알렸다. 뱉은 말에 책임을 질 것 같아서다. 그렇게 해서 첫 일탈은 가급적 원거리를 가자는 생각에서 1박2일로 전라도를 다녀왔고, 그게 계기가 되어 오늘을 있게 했다.
먼저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법당으로 올라갔다. 법당의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예전에도 몇 번 왔지만 바람처럼 설렁설렁 둘러보았을 뿐 이렇게 컸는지는 기억에 없다. 법당에 들어서자마자 연거푸 삼배를 올리고서야 부처님을 올려다보았다. 인자한 모습과 편안한 미소에 마음이 놓인다. 무슨 말씀을 할 것 같아 두 눈을 감고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가만히 기다렸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을 타고 놀던 바람이 뒤꿈치를 들고 일주문을 빠져나갔는지 고요하다.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태풍도 저렇게 빠져나가길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가.
애썼다, 장하다는 말이 환청으로 들린다. 참고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합장한 손이 떨리고 어깨도 흔들린다. 신성한 공간에서 뭐하는 짓인가 싶어 도리질하지만 멈추질 않는다. 우는 것도 힐링이 되었나보다. 무지근했던 머리가 한결 가볍다.
두 다리를 쭈욱 뻗었다. 버릇없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기로 했다. 사하촌을 지나 매표소와 통제소라는 관문을 통과하면서 여기 있는 동안만큼이라도 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내가 절대적인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면 어머니를 찾아가곤 했는데 어머니마저 떠나고 없으니 찾아갈 곳이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어머니에게 하듯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고 싶다. 부처님은 내가 스스로 그치기 전에 그만 말하라고 해서도 안 되고, 횡설수설하더라도 끝까지 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애썼다, 장하다는 추임새를 알맞게 넣어줘야 한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시험에 들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원망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투정도 부린다. 두서없이 쏟아낸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지 않고 새겨들었나보다. 주먹을 움켜 쥔 비로자나부처님의 손이 스르르 풀린다. 그 큰 손으로 등을 토닥인다.
동지가 지났다고는 하나 아직은 노루꼬리처럼 해가 짧은 2월이다. 법당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서는데 법당 문살에 영상처럼 한 폭의 그림이 나타났다. 부처님이 나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선물 같다.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려고 하지 않았다면 문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을까. 물론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을 등지고 몇 컷 찍어 지인들에게 보내니 곧바로 답이 온다. 어디냐고? 이게 뭐냐고?
가르쳐줄까 말까 망설이며 부처님을 올려다보니 씨-익 웃으시는데 가르쳐주라는 건지 놔두라는 건지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 없다. 마음이 가는대로 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래, 궁금해 하든 말든 가르쳐주지 말자.
하룻밤을 묵어야 할 숙소 앞에서 다른 방들을 둘러보니 방마다 댓돌 앞에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방마다 사람이 있음이다. 사하촌에 가 저녁 먹고 오니 다들 잠이 들었는지 불 켜진 방은 셋 밖에 안 된다. 창호지 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포근하고 아늑하다. 욕실에서 하루의 묵은 때를 씻고 커피를 끓이기 위해 커피포트를 빌린 것이 몇 분 전인데 그 방은 물론이고 불이 켜졌던 다른 방들마저도 깜깜하다. 이제 겨우 9시, 지금부터 커피 마시며 노트북을 켜야 하는데 칠흑 같은 어둠이 말한다. 어서 불을 끄라고.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다들 불 끄고 자니 내가 불을 켠들 알 사람이 없지 않은가. 입가에 웃음이 고인다.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린다. 딱딱, 모니터에서 길이 열린다. 소리가 컸는지 밖에서 헛기침소리가 난다. 도둑이 제 발 절인다고 하듯 불을 끄라는 신호인 것 같아 얼른 껐다. 커피까지 마셔 잠이 오지 않는데 이 밤을 어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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