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란이 필 때까지 / 이경숙
창고 문이 잠기지 않는다. 합판들이 떨어져 너덜거린다. 추녀가 길지 않아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다 보니 문이 틀어져 버린 것이다. 창고 문에 합판을 덧댈 양으로 이종동생이 운영하는 목재소에서 합판을 구해 왔다.
창고에는 장기간 보관을 요하는 생활용품, 거실에 들여놓지 못한 화분들이 창고 안에서 겨울을 난다. 하지만 문이 틀어졌으니 바람이 들이치면 겨울을 나야 하는 화분에 영향이 있으리라.
가로, 세로 문의 크기를 재어 합판에 자를 대고 선을 그었다. 그리곤 톱을 천천히 앞으로 밀고 뒤로 당겼다. 반복되는 톱질에 쌀가루같은 고운 입자들이 떨어졌다. 그어진 선을 따라 자를 때, 잠시 딴 생각을 했다가는 곡선이 지고 말았다. 다시 두 손으로 톱의 자루를 다잡고 곡진하게 잘랐을 때는 내가 보아도 흡족하리만큼 반듯했다. 그렇게 창고 문 보수 작업은 끝이 났다. 자르고 붙이는 일은 끝났지만 톱을 볼 때마다 늘 내 가슴이 아리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몇 해 전 가지치기를 잘못해서 화단의 향나무가 죽어 버렸다. 죽은 향나무를 뽑아낸 자리에 키 작은 옥향나무를 심었다. 뿌리까지 뽑아낸 향나무는 한동안 모과나무 곁에 세워두었다. 애처롭게 죽은 향나무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 곁에 두고 싶었다.
문득 생각난 것이 책꽂이였다. 향나무의 원형을 살려 책꽂이를 만들면 꽤 운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려면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된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당 한켠에 신문을 깔고 향나무를 끌고 왔다. 우선 끌로 향나무의 거칠고 투박한 겉껍질을 벗겨냈다. 껍질이 떨어져 나갈 때마다 연한 갈색 속살이 드러났다. 나무를 돌려가며 윗부분과 중간 그리고 아랫부분을 차례대로 손질했다. 향나무에 박힌 옹이의 거뭇거뭇한 껍질도 고운 색으로 돌아오도록 끌로 긁어내고 또 긁어냈다.
제멋대로 휘어진 뿌리도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굵은 뿌리와 가느다란 뿌리가 엉켜 이루어진 조화로움에서 생명력의 꿈틀거림이 엿보였다. 내년 초봄 이 뿌리에 풍난을 심어도 좋으리라. 우선 뿌리에 붙어 딱딱하게 굳어 있는 흙을 파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엉킨 뿌리에는 많은 양의 흙이 굳어 있었다. 한번 굳어지면 쉽게 풀어지지 않는 사람의 마음처럼....... 뿌리가 뒤엉킨 사이사이의 흙을 털어 내는 작업도 만만치가 않았지만 떨어져 나온 흙의 양에 놀랐다. 오랫동안 그냥 두었으니 뿌리의 일부도 썩어 있었다. 썩은 뿌리는 퍽석퍽석해서 끌을 대기만 해도 톱밥처럼 가루가 줄줄 흘렀다.
일차적인 나무 손질이 끝나고 다음은 잘라야 했다. 길이를 A4 용지의 긴 면보다 넉넉히 자르면 책꽂이 한 개 만들 개수의 통나무, 그리고 풍란을 심을 크기의 뿌리가 남을 것이다. 자를 부위에 눈금을 그어 놓았지만 균일하게 톱질할 자신이 없어서 나무둥치를 자루에 넣어 목재소로 가지고 갔다.
둥근 쇠의 가장자리에 붙은 삐쭉삐쭉한 쇠톱들은 보기에도 무서웠지만, 전기 스위치를 누르자 ‘윙’ 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양새에 소름이 끼쳤다. 트트트특 쇳소리를 내며 전기톱은 단박에 나무를 동강냈다. 나무는 토막이 났지만 자른 면이 매끈하지 않고 몇 줄의 층이 나 있었다. 공장장은 토막 난 나무의 양쪽 끝을 두 손으로 꽉 잡고 신중하게 전기톱 속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목재소에 있는 전기톱과 전기 대패로 내가 원하는 책꽂이로 사용할 통나무를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공장장의 봉합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보며 전기톱에도 정신의 기가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 시간을 묵묵히 인내하며 정성으로 자르고 다듬는 장인 정신이 있어야만 혼이 깃든 작품을 만들어 내듯이 자루 톱, 끌을 사용할 때처럼 전기톱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장은 나무뿌리는 아무 쓸모가 없다며 바닥에 던져버렸다. 공장장의 눈에는 하찮고 아무 쓸모없는 나무뿌리지만 내게는 생명을 숨 쉬게 할 촉매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나무뿌리를 주워서 가지고 온 자루에 집어넣었다.
작은아들이 어릴 때 병아리를 사 온 일이 있다. 그 병아리가 작은 몸을 떨며 눈을 감고 자꾸만 쓰러지는 것을 볼 때의 내 마음이 지금과 같으리라. 비상용으로 둔 감기약을 사람과 병아리의 무게비율까지 생각하며 아주 조금 떼어 숟가락에 개어 한사코 도리질을 하던 병아리에게 먹였다. 한참 뒤 병아리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 쓸모도 없다는 향나무 뿌리에 풍란이 잎과 꽃을 피우는 고운 모습을 그려본다. 얽히고설킨 세상사와 같은 뿌리를 쓰다듬으며 더욱 윤기나게 다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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