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 한 점 /김귀선
산골마을에 도착했을 땐 해거름 녘이었다. 외진 곳, 묵밭 사이의 하늘색 나지막한 슬레이트집으로 향했다. 그 집은 고모님이 칠십여 년을 홀로 사신 보금자리이다. 헐렁한 집 입구엔 해묵은 싸리울타리를 비집고 호박 넝쿨, 한삼 줄기, 머구잎 등이 얼기설기 엉켜 있었다.
구순을 앞둔 고모님은 방문 앞의 평상에 앉아 계셨다. 비닐장판을 덧씌운 살평상에는 빨간 고추가 가지런했다. 세운 두 정강이에 굽은 몸을 기대어 고모님은 고추를 만지던 중이었다.
“고모님예, 저 아시겠능교?”
“아이구, 보자 누구고? 잘 모르겠니데이.”
치매 끼가 있는 고모님은 얘기를 더 나눈 뒤에야 상대를 알아챘다. 그리곤 찾아와줘 고맙다고 열 번도 더 인사했다. 방문 위 벽에는 '술 절대 금지'라고 붙어 있었다. 희야 언니가 손님들을 향해 적어놨나 보다. 글씨를 쳐다보자 인제는 술 끊었다는 듯 고모님이 슬쩍 웃었다.
열여섯에 혼인한 고모님은 삼 개월의 결혼생활이 전부다. 딸 하나 키우며 날품팔이로 살아냈다. 군대에 갔던 남편이 제대하자마자 서울에서 딴살림을 차려버려서다. 글도 모른 고모님은 당신의 그 한을 긴 노래로 엮었다. 친정에 들를 때마다 굽이굽이 한을 풀어내어 주위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했다.
“우리 희야가 내한테 참 잘 한다. 사위랑 외손주들도. 그래도 한번 씩 속이 꽉 차올라오면 친정 빈집에 델다 달라 해서 술 한 잔 따라 놓고 실컷 울어뿐다. 젊을 적엔 멀리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신랑 오는 강 싶어 날밤을 샜디라. 그리그리 한 세월 다 가뿌랬제.”
바람났다 할까봐 물색옷 한번 못 입었다는 고모님은 지금도 밝은 옷 입는 것이 부담스럽단다. 인사를 하고 마당을 나오는데 날이 어두부리했다. 울컥해 뒤돌아봤다. 또 돌아봤다. 들깻잎이 우북한 마당 한 쪽, 배웅할 때 모습 그대로 고모님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구부정하게 서 계셨다. 오래된 망부석처럼 고요해 보였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아호를 건네다 / 손숙희 (0) | 2022.08.20 |
---|---|
[좋은수필]빗살 / 이은희 (1) | 2022.08.19 |
[좋은수필]수유의 기억 / 유시경 (0) | 2022.08.17 |
[좋은수필]못 / 박방희 (0) | 2022.08.16 |
[좋은수필]흔들리는 것들 / 이은희 (0) | 2022.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