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여자 / 김 경
아파트 통로를 나서면 어김없이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작은 키에 꾸민 티라고는 없는, 헐렁한 유니폼 차림의 젊은 여자다. 그녀는 우유며 요구르트를 실은 전동 카트와 한 몸이 되어 날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길을 드나드는 나는 그녀를 피할 수 없다. 더군다나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얼굴을 모른 척할 배짱이 없다.
2. 단지마다 일정한 구역을 나눠 똑같은 카트를 놓고 우유를 파는 이들 대부분이 소일거리를 찾는 중년인 반면, 우리 아파트만 유독 젊은 여자다. 내 눈에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으니 어리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런 그녀가 길에서 우유를 팔고 있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때론 의아스럽기도 하다. 사람들은 얼마 안 가 그것이 편견임을 알게 되는데 남달리 상냥하고 당당한 모습에서 삶의 긍정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겨울 끝 무렵이었다. 무거운 시장 가방을 들고 막 아파트로 들어서려는데 그녀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코가 석 잔데 날 더러 어쩌라고.......”
주변 시선도 아랑곳없이 카트 아래 쪼그리고 앉아 통화에 열중하는 얼굴엔 웃음 대신 근심 덩어리가 매달려 있었다. 늘 웃던 얼굴에 무거운 삶의 짐이 얹혀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다음 날, 우유를 매일같이 배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전날의 침울함은 간데없이 그녀는 예의 톤 높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조카뻘 나이의 앳된 여자가 추우나 더우나 길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일부러 걸음을 멈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배달을 시켜놓고도 현관문에 걸린 우유 주머니를 무심히 지나치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다음 날 곧장 문자가 날아왔다.
“어제 우유가 그대로 있네요. 많이 바쁘신가 봐요. 오늘 우유는 넣지 않을게요.”
그냥 넣어두면 될 것을 번번이 이런 문자를 보내거나 쪽지를 우유 주머니에 붙여놓으니 괜히 민망했다. 그녀는 이따금 팔다 남은 딸기 우유나 요구르트 몇 병을 넣어두고 갔다.
코앞에 진을 친 그녀를 매번 아는 척을 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따지고 보면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곁을 지날 때마다 무심을 가장한 채 그녀의 기척을 살피는 내가 우스꽝스러웠다. 그런 어정쩡함을 가시게 해 줄 기회가 찾아왔다. 산책을 나선 길에 우연히 그녀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가 내 옆으로 몇 걸음 떨어져 섰다. 축 처진 어깨, 무표정한 얼굴의 존재를 알아보고도 나는 약간 뜸을 들여 아는 체를 했다.
“퇴근하세요?”
“아 네, 전 또 누구시라고.”
서둘러 표정 관리를 마친 그녀가 해맑게 호호, 하고 웃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나란히 걷게 되었고, 무언가를 묻고 대답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녀는 내가 즐겨 걷는 코스 중간쯤에 있는 아파트까지 간다 했다. 언뜻 계산해도 족히 삼십 분은 걸리는 거리였다. 혼자 느릿느릿 걸으며 주변 풍경을 즐기자고, 자유로운 상념에 젖을 요량으로 걷는 길인데 낭패다 싶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녁 무렵 운동 삼아 걷는 이 길이 좋다는데 합의점을 찾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딱히 할 말이 없었으므로 이따금 내가 물었고 그녀가 대답했다. 서른 후반의 미혼이라는 것, 지병이 있는 아버지를 위해 매일 퇴근길에 들러 환자식을 손수 만든다는 것 그리고 늦은 밤에야 근처에 얻어놓은 자신만의 보금자리로 돌아간다는 것까지 그녀는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그 돈으로 아버지를 보살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천진스럽게 웃었다.
언젠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다가온 노인을 반기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는 얼른 요구르트를 내밀었고 노인은 얼음이 반쯤 녹은 아이스커피를 그녀 손에 들려주었다. 온종일 집에만 머무는 아버지를 운동시킬 목적으로 일부러 커피를 사다 달라고 졸랐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날의 정황이 이해되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대화 중에도 어서 헤어질 핑계를 찾았다. 그녀가 아니라 내 쪽에서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길 건너에 사람들이 줄을 선 만둣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만두 먹고 갈래요?”
“아녜요, 괜찮아요.”
빨리 가서 아버지 식단을 챙겨야 한다며 그녀가 거절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만둣가게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끝까지 동행했을 것이고, 나는 또 이런저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대답과 함께 자꾸만 웃어야 했을 것이다.
그녀는 가던 길로, 나는 만둣가게로 향했다. 내 차례가 되어 포장 만두를 주문하고는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여자가 터덜터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멀어질수록 뒷모습이 고단하고 쓸쓸해 보였다. 그것은 막 그녀 어깨에 내려앉고 있는 석양 때문일 거라고,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우기며 나는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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