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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눈썹 담 / 정수연

눈썹 담 / 정수연

 

 

양동 마을은 문화유산이라는 느낌보다 잃어버린 고향을 만난 것처럼 포근함을 준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다소곳이 모여 있는 초가지붕의 들뜨지 않은 빛깔에서부터 친근감이 든다. 나지막한 토담, 처마 끝에 매달린 씨앗 봉지, 돌로 쌓아 올린 우물, 낯익은 모습에서 옛것을 그대로 이어온 선인들의 숨결이 온몸 깊숙이 스며든다. 띄엄띄엄 흩어져 있지만, 우뚝 솟은 기와집을 둘러싸듯 낮게 엎드린 초가지붕이 설창산의 능선을 따라 조화를 이루며 마을 전체를 아우른다.

양동 마을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있다. 경주 손 씨와 여강 이 씨 두 가문이 약 오백 년간 대를 이어서 거주하고 있는 집성촌이다. 옛 가옥에서 실제로 사람이 생활하려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닐 터이다. 전통을 보존하고 이어가려는 후손들의 정신적인 소양이 돋보인다. 드물게 볼 수 있는 처가 입 항형인 마을로, 그에 얽힌 숨은 이야기와 고유한 특징이 살아 움직인다.

토담을 따라 곱게 다져진 고샅길을 오르며, 이 소중한 자산이 오래도록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군데군데 서있는 자동차와 번져오는 문명의 그늘을 밀쳐내고 싶다. 양동 마을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게다. 도시생활의 삭막함에 지칠 때면, 언제라도 반겨줄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싶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는지도 모른다.

안골 서백당은 경주 손 씨의 종택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 마당이 길손을 맞는다. 축대를 쌓아 덩그렇게 지은 사랑채에 걸린 편액의 글귀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사랑채 앞 마루가 안채로 이어지고, 경계를 나타내듯 그 쪽마루 난간에 잇닿아 눈썹 담이 나직하게 엎드려 있다. 중간중간에 돌을 박아놓은 전형적인 흙 담이다. 언뜻, 굴뚝으로 오인하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기와로 지붕을 소담스럽게 올려놓았고, 흙 담 아래쪽에는 테두리를 치고 빙 둘러 심어놓은 채송화가 자지러지게 곱다.

다른 고택의 내외 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무시로 안채와 사당을 드나들 수 있게 안마당 통로의 반은 틔워 놓았다. 일종의 가리개처럼 햇빛도 바람길도 방해하지 않는다. 건물과 사당, 안마당의 조경을 염두에 둔 듯, 자연 풍광을 배려한 선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눈썹 담은 쌓아 올리다 만 것처럼 시늉만 한 담이지만, 조상님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 느껴진다. 사당 입구인 안채 마당을 함부로 드나들지 말라는 상징성을 담고 있을 성싶다. 삶 역시 이승과 저승을 잇는 경계의 순간이 아니던가, 가파른 사당의 계단은 생과 사의 분기점을 일러주는 듯, 죽음을 의식하며 삶을 돌아보라는 의미도 담겼으리라. 참을 인() 자 백 번을 쓴다는 고사에서 연유한 서백당(書百堂)의 당호처럼 인생에서도 지켜야 할 도리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이 있음을 깨우쳐 주는 듯하다.

 

경계의 의미는 어떤 기준에 의하여 나누어지는 한계선이다. 분단이나 국경선처럼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선도 있지만, 세대 간의 분리, 계층 간의 갈등, 이념과 인습은 눈에 보이는 벽보다 훨씬 두껍고 견고하게 인간의 삶을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면, 한 세대의 출발인 동시에 윗세대와의 분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새는 새끼가 자라면 둥지를 떠나보낸다. 이처럼 당연한 일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허무한 상실감으로 한동안 힘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경계선에서 머뭇거릴 수 없는 일이다. 심리적으로 놓아주지 못하면 세대 간에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시련이었다.

세월의 주름이 늘어나면서 내가 설자리도 가늠이 된다. 저희들이 뿌리내린 곳에 자리 잡아가는 만큼 삶의 경계는 더욱 확실하고 굳건해진다. 자식에 대한 안타까운 기대나 미련에도 절제 선을 그어야 하겠지만, 아직도 애착을 떨쳐내지 못하고 자꾸만 주춤거린다. 같이 여행을 다니면서 한 공간에 뒹굴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담은 허물어지지도 않는다. 일정이 끝나면 각자의 소지품을 챙겨 돌아설 때의 마음은 알곡을 털어낸 빈 들판에 허수아비처럼 허전하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 우르르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가는 뒷모습에서 넘볼 수 없는 경계선은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 아닐까. 본능과 이성으로 갈등하는 인간에게 내면의 경계를 인식한다는 건, 마음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리라. 아무리 가깝고 흉허물 없는 사이라도 지켜야 할 예의와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는 것이다. 분노의 감정을 여과 없이 마구 쏟아내어 비인격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할 성싶다. 한 번 입은 마음의 상처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심한 경우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응어리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가장 사랑하고 아끼면서도 편하다는 이유로 더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것 같다.

허물어야 할 담과 그어야할 선의 문턱에서는 언제나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안젤름 그륀 신부님은 우리의 내면에는 선과 악, 사랑과 미움처럼 두 가지의 마음이 불과 분의 관계로 경계를 이룬다고 했다. 그것을 인정하고 긴장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긍정적인 삶의 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내 안에 자리한 고집스러운 편견과 이기심, 헛된 욕심과 집착,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선을 긋고 보는 아집은 허물어야 할 담이리라

마음이 생각대로 움직여 준다면 갈등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내 의지대로 선을 긋고 허무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는 무시로 격해지는 마음 다스리기가 너무 힘들다. 감정에 치우쳐 즉각 맞대응하고 나면 잘했다는 생각보다는 좀 참을 걸 하고 후회할 때가 더 많다.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쏟아내는 말은 그대로 담이 되어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참을 수 있는 한계선은 어디까지일까.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일 듯싶다.

 

경주 손 씨와 여강 이 씨 두 가문이 오랜 세월 동안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 간에 이기심을 버리고 이해와 배려로 지켜야 할 도리와 예의에 선을 넘지 않았기에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백 년이 넘는 향나무가 서백당 사당 입구를 지키고 있다. 옛 조상은 사라졌어도 봄이면 새순을 틔워 몸피를 불리는 생명체는, 오늘의 햇빛을 받으며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않고 연륜을 쌓아 간다. 정갈하게 빗질이 된 안마당에 감도는 적요 속에서 눈썹 담의 상징성을 되새겨 본다. 소중한 관계일수록 지켜야 할 도리를 의식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내면을 다독이는 경고음으로 삼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