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 / 송마나
오렌지 열매는 격정이 빛깔로 뿜어져 나온 연금술의 결정이다. 솟구치는 욕망은 뜨거운 태양을 끌어안고 황금빛을 쏟아낸다. 오렌지 나무마다 열린 금빛 열매들이 제각각의 절정을 치켜세우고 있다. 대지는 속살을 열고 이 농밀한 관능을 받아들인다. 석양은 고흐가 그렸던 오렌지빛 하늘의 정염을 온몸으로 빨아들여 몽환의 바다 위에 사정하듯 풀어놓는다.
오렌지의 밝은 주황빛은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이 치명적인 매혹은 번개처럼 우리 몸을 스친다. 사랑의 습격이다. 피아노 건반위를 더듬거리던 손가락들이 격렬하게 움직인다. 연주하는 곡의 악보가 육체로 전달되어 내벽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동화 속의 요정이나 동물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들려온다. 시의 얼개에 갇힌 단어들이 해체되어 자유혼으로 날아오른다. 사랑, 예술, 독서는 거역할 수 없는 원초적인 끌림으로 여태껏 열리지 않았던 희열의 문을 열게 한다.
스탕달의 소설 《파르마의 수도원》*은 오렌지빛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클렐리아는 파브리스가 탑 꼭대기에 갇혀 있을 때 그가 볼 수 있게 그녀의 창문 앞에 오렌지 나무를 심었다. 파브리스는 손목시계 태엽의 톱니로 옥창獄窓앞에 덧대놓은 가림막의 판자 한 칸을 잘라, 그 구멍으로 오렌지나무를 바라보며 황금비처럼 쏟아지는 행복을 느꼈다. 클렐리아는 파브리스가 감옥에서 풀려나오자 오렌지 나무 온실 안에서 창문을 모두 막아놓고 그와 사랑을 나눴다. 클렐리아와 파브리스의 사랑에는 왜 오렌지 나무가 하께하는가?
두 연인은 사랑하지만 19세기 초 이탈리아의 격동적인 사회와 궁정의 암투로 인하여 클렐리아는 크레센치 후작과 결혼하고, 파브리스는 사제가 된다. 클렐리아는 '내 눈으로 결코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은 종이를 성당의 제단 위에서 살라 성모 마리아에게 전해지도록 한다. 그러나 오렌지빛이 내뿜는 유혹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진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완전히 홀려드는 것일까.
클렐리아와 파브리스가 밤에만, 오로지 한 줄기 빛도 새어들 수 없는 어둠 속 귀퉁이에서만 포옹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밀려나 보이지 않는 사랑을 하는 것이리라.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과 호흡은 자유의지를 넘어선 욕망의 바탕에서 솟구친다. 태생 동물의 체내에서 이루어진 황홀경의 순간에 우리는 모두 눈을 감는다. 육체가 몰입되는 관능의 극한은 태초의 아득한 어둠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생명도 이 황홀한 밤에 생겨났지만 그 순간을 볼 수 없었다.
탱탱한 오렌지 열매는 누군가가 껍질을 벗기기만 하면 달콤한 과즙으로 흘러내린다. 태양 아래 드러나는 나체, 타인의 눈길을 끌려고 벌거벗은 몸은 노출이지 나체가 아니다. 인간만이 태어나자마자 배내옷으로 알몸을 가려 나체를 상실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자신을 부각하려는 의지가 강해지면서 노출 부위는 넓어진다. 현란한 태양빛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은 갈수록 노출 수위를 높여 함부로 벗은 그들의 육체를 차마 두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 사랑은 매혹하는 시선, 사랑은 언어가 아닌 포옹을, 노출이 아닌 나체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것이리라.
태양의 핏빛이 수평선으로 흘러내려 바다를 물들이는 저녁놀은 유난히 아름답다. 석양은 불타오르는 삶의 마지막 불꽃으로 강렬한 황금빛을 내뿜기 때문이다. 이 황혼의 불꽃은 화려한 춤사위로 온 세상을 고혹적으로 물들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내 타는 갈증으로 노란빛을 뱉어내다가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 순간의 허망함이란, 바다마저 텅 빈 적막 속에서 숨을 멈춘다.
노을이 사라진 하늘은 우리 마음을 멍멍하게 한다. 오렌지 향기는 감미롭지만 영원하지 않다. 향기를 멈춘 오렌지 열매는 그 빛을 잃고 종당에는 말라 부스러지고 만다. 욕망이란 끝없는 달리기이지만 종착역에서는 허무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인간은 탐진치貪瞋痴란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가련한 존재 클렐리아와 파브리스 역시 욕망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오렌지 나무 온실 밖에서 사랑을 나눴다. 크레센치 후작이 자신의 아들로 알고 키운 클렐리아와 파브리스의 아들을 몰래 빼돌렸다. 그들의 욕망은 갈수록 커져갔다. 욕망의 끝은 죽음이라고 했던가. 환한 빛 아래서 아들 산드리노가 죽고 말았다. 클렐리아가 죽었다. 파브리스가 죽었다.
인간은 집단의 담론이 개입하지 않는 사랑을 갈망한다. 식탁 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참을 수 없어 상대방의 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젓가락을 들어 올리곤 한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신을 창조하여 영생을 얻기도 한다.
분화구 속에서 솟구치는 용암, 우리에 갇혀 포효하는 호랑이,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 현재에서 벗어나 무엇인가를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역마살, 그 어떤 것도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명상, 황홀경, 글쓰기도 욕망을 욕망한다.
욕망은 사라진 별자리를 아쉬워하며 기다리기, 신기루를 바라보다가 그만 눈이 멀어버리기, 태초를 볼 수 없어 그것을 상상하며 꿈꾸는 것이리라. 욕망은 멈출 줄 모르는 본능의 유령.
나의 메마른 벌판에서는 아직도 오렌지 향기가 날리는지 알 수 없다.
*《파르마의 수도원》은 프랑스의 스탕달 (1783~1842)이 16세기 이탈리아 고문서에서 읽은 <파르네제 가문의 위대함의 기원>에서 영감을 얻어, 작가의 시대인 19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나폴레옹의 서사시를 접목한 소설, '파브리스 델 동고'라는 인물의 사랑과 모험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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