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떠나가는 배'에 관한 명상 / 황주리

'떠나가는 배'에 관한 명상 / 황주리

 

 

 

여행을 하다가 비행기나 배를 놓치는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얼마나 떠나가는 배나 비행기가 마치 이 세상이 끝이라도 난 것처럼 허망한 마음을 남기는지를. 만일 전쟁 같은 비상 시라면 그 한번 놓친 배나 비행기로 인해 생사의 기로에 놓일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아무리 현대 문명이 발전했다 해도 안개 낀 섬에서 육지로 탈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박 삼일 예정으로 덕적도를 향해 떠났던 나는 포구에 죽 늘어앉은 섬 아주머니들이 파는 자연산 도다리와 놀래미와 갑오징어를 구경하다가 너무나 싼 값에 홀려서 육지로 가는 배를 놓쳤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날 정도로 절실해지는 마음을 그 무엇이 비하랴. 저 떠나가는 배를 잡을 수만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만 같았다. 아마 많은 일이 그럴 것이다. 떠나가는 그 님을 잡을 수만 있다면, 떨어진 대학에 붙을 수만 있다면, 면접에서 떨어진 그 회사에 취직할 수만 있다면, 등등. 하지만 하루에 한 번 밖에 오지 않는 배가 떠났다 해도 사실 그리 나쁠 것도 없다. 섬에서의 아름다운 시간을 하루 더 연장 받은 것이다.

섬이란 고립의 의미뿐 아니라 감금의 의미를 지닌다. 날씨가 나쁘면 몇 날 며칠 발이 묶이는 곳이 바로 섬이다. 바로 내가 그랬다. 배를 놓친 다음 날은 일찌감치 포구에 도착했다.

'안개로 인해 금일 운항 중단'이라는 글씨를 보았을 때 정말 주저앉고 싶었다. 그 옛날 섬으로 귀향 간 선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선비들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기분으로 한참을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아니 바다를 바라본 게 아니라 허공의 심연, 마음의 저 먼 자리 끝자락에 서 있는 자신의 무기력한 그림자와 만난 것이리라. 안개와 비와 폭풍과 수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제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온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다.

이쯤 되면 행복의 취향 쪽을 지닌 사람과 불행의 취향 쪽을 지닌 사람으로 판이하게 나뉜다. 말할 것도 없이 섬에 갇혔을 때 행복의 취향을 가진 사람 쪽이 훨씬 유리하다. 이미 볼 곳다 본 지루하고 따분한 섬이 아니라, 시시각각 풍경이 변하는 아름다운 섬을 즐길 수 있는 아주 드문 기회로 삼는 사람들만이 휴식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들이다. 운명적인 휴식, 이것이 바로 섬에 갇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동행한 친구와 그저 너 때문이니 나 때문이니 하면서 싸움을 그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마련이다. 도시에서의 일정과 다음날의 약속들이 우리를 숨 가쁘게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얼마나 중요한 일들이 있는 것일까? 섬이 좋아 도시를 버리고 직장을 버리고 섬에 눌러앉은 사람들도 있다. 어디 섬 뿐이랴. 네팔에서 산이 좋아 민박을 경영하며 시간 날 때마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한국인 젊은 부부 네서 묵었던 생각이 난다.

덕적도에서 우리가 묵은 곳도 그랬다. 젊은 부부가 섬이 좋아 섬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섬 병이 도져서 도시에서는 살 수 없었다는 '서랑 님박'의 부부는 한 마흔쯤 되었을까. 참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서포리 바닷가를 마치 제 마당처럼 앞에 둔 그곳에서, 육지로 떠나지 못한 우리는 정말 바다를 원도 한도 없이 바라보았다. 배를 놓치기 전날은 덕적도에서 배를 타고 한두 시간 더 들어가는 백아도를 다녀왔다.

그야말로 배를 놓치면 일주일 아니 한 달도 묶일 수 있다는 그 고립의 섬들이 이 세상에는 몇 개나 되는 걸까? 백아도는 그 이름만큼이나 깨끗하고 맑고 아름다운 섬이다. 구멍가게 하나 없어서 맥주 한 병도 살 수 없는 곳, 우리는 그곳에서 유명한 이장 댁에서 묵었다. 그 집 아주머니가 끓여주는 매운탕 맛도, 매일 직접 잡아 상에 올리는 생선회의 달고 싱싱한 맛 또한 섬 여행의 진수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섬 여행의 매력은 그곳에서 우리가 철저히 혼자가 되어보는 것이 아닐까? 책 몇 권 들고 가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드러누워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죽여도 좋은 곳, 도시로 돌아가면 나 자신도 머지않아 섬 병이 도질 것만 같았다.

스무 살 시절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외로운 건 섬이 아니다. 섬에서 섬으로 가려면 배를 타고 가면 된다. 몇날 며칠 안개가 자욱해서 배가 뜨지 않더라도, 그저 배만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라는 섬에서 ''라는 섬으로 가려면 우리는 무엇을 타고 가야 할까? 우리들 모두는 다 하나의 작은 섬이다.

그때의 내게는 이 세상 그 어느 곳이나 다 고립된 섬이었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젊은 날 우리 모두는 그저 외롭게 표류하는 섬이었다. 섬과 섬이 만나서 아무리 곁에 있어도 그저 따로따로 섬일 수밖에는 없는 인간 존재의 고독감을 그때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이 또 있을까?

지금의 나는 일부러 고독을 찾아 섬으로 간다. 그 고독이 참으로 사람을 맑고 투명하게 청소해 준다는 걸 아는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섬, 덕적도에 가면 서포리나 밭지름 해변도 좋지만, 능동 자갈 마당에 꼭 가볼 일이다. 평범한 자갈돌들로 시작되는 그곳은 이쪽 편에서 저쪽 끝으로 걸어갈수록, 이 지구상의 돌들이 아닌 다른 낯선 혹성에 불시작한 듯한 신비한 돌들로 가득하다. 그곳이 화성일까? 달나라는 아닐까?

정말 산책하기 참 좋은 별 지구, 그 중에서도 덕적도, 그 무심하게 떠나가던 배를 어찌 잊을까? 우리들의 삶도 어느 날 저 떠나가는 배처럼 무심하게 떠나가리리. 사랑하다. 무심하고 아쉬워서 더욱 아름다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