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비애悲哀 / 김정순
황당한 일이었다. 절망이 곤두박질쳤다. 속상함도 사치였다.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린 채 멍해졌다. 내게 이런 기막힌 일이 생기다니? 불난 뒤의 매연처럼 소리 없이 스며들어 오염시키는 노년의 비애.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 불을 켰다. 물이 물방울을 뿜어 올리며 끓기 시작했다. 준비한 나물을 넣었다. 오줌이 마려운 신호가 살짝 왔다. 나물을 다 삶아 건져놓고 화장실을 가도 될 거라는 짐작을 했다. 그리 급한 요의를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심한 재채기가 났다. 소변이 찔끔 고개를 내밀었다. 곧 숨어들겠지 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몸통까지 불쑥 밀고 나왔다. 못된 것은 내 의지의 한계를 넘어 나를 비웃듯 폭포로 쏟아졌다. ‘아! 이게 뭔가?’ 그 자리에 서서 망연자실했다. 둑이 터진 봇물은 나의 허락도 없이 금단의 땅을 침범했다. 신성한 속옷의 울타리를 넘고 바지라는 계곡을 따라 낮은 곳으로 폭포를 이뤘다. 평평한 바닥에 호수가 생겼다. 꼼짝을 못하고 선채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늙었구나! 나도 세월의 장난질에 비켜갈 수 없구나.’ 초라한 늙은이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존감에 울음조차 울지 못하고 허망 속을 헤맸다. 기가 막힌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표현에 딱 맞았다.
친구들이 요실금의 사연을 이야기했지만,, 그냥 받아넘기고 웃었다. 나는 요실금에 대하여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고 겪지도 않았다. 단지 강 건너의 불구경쯤으로 여겼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은 자신이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맞았다. 나의 경우는 요실금을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나는 늙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살아왔다. 눈이 침침해 찾아간 안과에서 심각한 문제니 종합병원으로 가라는 진단도 받았다. 황반에 구멍이 뚫어졌다고 했다. 전신마취를 하고 정밀한 수술을 받았다. 아직도 불편함이 해소되지 않았다. 모든 물체가 물결이 지듯 구불구불하게 보였다. 노안으로 인한 일이려니 생각하고 인정했다. 그러나 소변사건은 후유증이 남지 않았는데 마음의 상처가 심각했다. 허허! 웃으면서 “나 오줌 쌌어.”농담처럼 말하지만 기운을 빼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언젠가, 척추 압박골절로 꼼짝을 못 한 일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일어설 수도 없었다. 침대에 옮겨져 반듯하게 누워서 옆으로 몸을 돌릴 수도 일어날 수도 없어 난감했다. 소변이 마려워도 화장실을 갈 수 없는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늙었다는 불청객이 이렇듯 찾아왔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았다.
급성폐렴이 와서 2주일을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다. 기침과 혈담을 뱉을 만큼 심각했다. 기침으로 이웃병상의 수면을 방해할까 밤새워 휴게실과 복도를 다니며 밤을 새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폐의 전부가 하얗게 덮여있어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치료하면 나아지겠지 하는 무모하리만치 태연했다. 지금보다 젊어서였을까.
내게서 일어나는 건강문제는 나이와 비례해서 일어났다. 절망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많아진다는 것이 이렇게 슬프고 아픈 일인지를 일흔을 건너면서 절실히 느꼈다. 늘어진 볼과 주름은 보기 싫지만 어쩔 수 없는 노화의 현상이라고 치부했다. 간혹 무릎에 통증이 있어도 일흔여섯 해를 넘도록 혹사시켰으니,, 당연하다 여겼다. 어깨가 처지고 등이 굽어도 그르려니 했다. 누가 나에게 건강하냐고 물으면 나이만큼 건강하다고 답했다. 나이가 들어서 젊은이처럼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노년의 우울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깊어졌다. 반갑지 않은 몸의 반란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혹시나, 치매라도 온다면 중풍이라도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노인들에게는 암이라는 병이 오히려 두렵지 않다는 말을 친구들은 서슴없이 했다. 암은 마지막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어서 홀가분하다고 했다. 치매나 중풍처럼 끝이 어딘지를 모르는 상태로 가족을 괴롭히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반가운 것은 아닐 것이다. 불가항력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나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그날의 사건을 애써 부정했다. ‘아마,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에 자극받은 것이 이유였을 거야.. 우연히 심한 재채기가 장난을 쳤을 거야. 건강에 소홀한 나에게 몸이 보내는 경고였을 거야. 나의 몸과 마음은 아직 괜찮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우울 속에 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들메끈을 단단히 묶는 것처럼 마음의 끈을 조였다. 어디든 좋았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사람도 만나고 꽃들과 인사도하고 하늘과 눈 맞춤도 했다. 밤하늘의 달과 별이 이야기를 걸어왔다. 눈을 살포시 감고 마술을 걸었다. 나는 어느 별나라의 공주가 되어 날개옷을 입고 날아다녔다. 꿈을 꾸면 이루어지는 것을… 무릎을 쳤다.
다시 시작했다. 컴퓨터를 열고 좌판을 열심히 두드렸다. 나의 능력을 벗어나서 일어난 일에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채워나갔다. 햇살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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