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들의 숨결 / 송복련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꽃은 마구 피는데 처녀들 마음도 마냥 싱숭생숭할 수밖에. 져 나르던 물동이와 밭매던 호미 자루마저 팽개치고 싶은 봄날이다. 노래 가사의 일부이지만 물동이는 생활에 요긴한 물건이었다. 예전, 여자애들은 물동이 이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해서 똬리에 얹은 물동이를 손으로 잡지 않고서도 기막히게 잘 걸었다. 아낙네쯤 되면 양손에 아이 손을 잡고 보퉁이까지 들고 갈 만큼 숙달되었다.
옹기는 사는 곳이나 시대에 따라 모양이나 이름이 다채롭다. 독이나 항아리 단지로 불릴 때는 크기가 다르고 유약을 바르지 않거나 잿물을 입힌 것이 있나 하면 소주를 만드는 소줏고리,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와 물을이고 다니는 동이와 그를 담아두는 물두멍, 찌개를 끓이면 뚝배기, 똥장군 같은 구린내를 풍기는 이름까지 있으니, 모두가 흙에서 태어난 것이다. 주로 그릇으로 쓰이던 옹기는 사람들과 함께 숨 쉬며 그 곁에서 오래전부터 머물렀다.
시어머니가 처음 우리 집에 오신 날 장터에서 독 세 개를 사 들여놓으셨다.. 윤기가 반지르르한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갖출 것들을 다 갖춘 듯 집안이 꽉 찼다. 정월 말午날에 물어물어 소금의 농도를 맞추어 처음으로 장을 담그던 날의 자랑이 가물거린다. 살림 맛을 알아가며 올망졸망 늘어가던 옹기들은 햇볕과 바람과 소통하며 숙성시킨 양념들은 살림 솜씨와 함께 풍성하게 익어갔다. 늦가을 화단 한쪽에 묻어둔 독에서 꺼내 먹던 김장김치의 쨍한 맛은 이제 기억 속에 저장되어 그때의 김치 맛을 따라갈 수 없다. 아파트로 이사 다니며 떠나보낸 것들 가운데 빈 고추장 항아리만 이제 쓸쓸하게 베란다를 지킨다.
내 곁에서 멀어진 옹기를 생각하며 '이포리 옹기가마'를 찾았다. 경사진 언덕으로 통가마가 길게 자리한 곳에는 옹기들이 차곡차곡 들어차고 있었다. 곁에는 장작들이 비닐을 쓰고 불 지필 날을 기다렸다. 작업장으로 드니 옹기 장인이 우릴 반긴다. 아들과 손자들이 연신 물레를 돌리며 옹기 만드는 과정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가래떡 같은 흙을 쌓으며 발로 물레를 돌린 다음 도개를 사용해 안팎에서 두드렸다. 한쪽에는 날 옹기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예전 방식 그대로 만드는 옹기장은 6대째 가업을 이어온 기능보유자이다. 이제는 아들 손자 3대가 한마음으로 옛것을 지키며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가마에 불이 지피는 날 꼭 다시 찾아보리라. 흙에서 나온 것들이 1200도의 장작불로 단련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걸 보고 싶다. 젊은 날의 혹독한 시련 끝에 철이 드는 것처럼 옹기들은 제자리를 잡고 앉아 바깥 세계와 소통하는 단단한 물건이 되리라고.
어린 시절 술래잡기할 때 숨어들던 장독 옆에는 석류가 익어가고 대추알이 단지 뚜껑 위로 굴렀다. 어둑한 부엌 한 귀퉁이 물독에는 물바가지가 떠 있었는데 엎어진 바가지를 장난삼아 두드리면 장단이 흘러나왔다. 원주민들이 타악기를 두드리던 손놀림처럼 장단이 척척 맞으면 듣기 좋은 음악이 되었다. 옹기들이 키를 맞추며 나란히 줄을 섰던 장독대에 빈 독도 있었다. 머리를 박고 소리 내면 우렁우렁 울리는 소리에 재미를 느껴보았으리라. 큰길가 술 어매가 술독을 휘저어 바가지로 퍼주던 시큼털털한 막걸리를 주전자에 받아오던 날의 술맛을 떠올리게 한다.
독은 먹고사는데 요긴했건만 옹기장이는 그다지 대접받지 못하고 그 무게만큼이나 삶이 버거웠다. 그러고도 그 일을 대물림하며 가난하게 살아가니 오죽 힘에 겨웠을까. 독이 만들어질 때까지 흙을 만지는 일이나 불을 때서 구워내는 과정들이 만만찮았고 팔기 위해 지게에 지고 장터로 향하는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구부러진 허리가 애잔하다. 머리 위까지 솟은 독은 자주 팔리는 물건이 아니라 팔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은 풀린 다리에 안간힘을 써야 했다.
황순원의 소설을 읽은 탓인지 항아리 대신에 독이라고 말할 때는 ''독 짓는 늙은이'라는 말이 따라 나온다. 송 영감이 일곱 살 당손이를 남의 집으로 떠나보내고 옹기가마로 기어드는 모습은 처절했다. 견딜 수 없이 뜨거운 곳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들어가던 그가 곁창으로 새어드는 햇빛 속에서 찾아낸 것은 터져나간 독 조각들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가 독을 대신이라도 하듯이 깨진 독 조각 앞에 단정히 꿇어앉는다.. 자신을 소신공양하려는지 깨진 독과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 이 작품은 슬픈 여운으로 남아 있다.
단단해 보이는 옹기들도 마지막에는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들과 함께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 소박한 도구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리는 것이라 못내 아쉽다. 편리함만 고집하다 스스로 숨 막히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옹기를 다시 돌아보게 되리라. 친환경이라는 말이 자주 들리고는 있지만 잃어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옹기들의 숨결이 그리워지는 시간이다.